고려의 주현군과 주진군
- 최초 등록일
- 2014.10.20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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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주현군
1) 주현군의 성립
2) 주현군의 성격
3) 주현군의 임무
2. 주진군과 국방체제
1) 양계의 주진과 주진군
2) 주진군의 조직과 지휘계통
3) 주진군의 임무
4) 주진군 소속의 군인
5) 주진군의 변천
본문내용
(1) 주현군 《고려사》 권 83, 지 37, 병3, 주현군조를 보면 고려의 지방군 모두를 주현군이라 칭하고 있지만 같은 지방군이었다고 하더라도 5도에 배치되었던 지방군과 양계에 배치되었던 지방군은 구별되는 존재였다. 여기에서의 주현군이란 5도에 배치되었던 지방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가. 광군
주현군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형성되었을까. 이때 우선 생각되는 것이 정종 2년(947)에 조직된 광군이다. 잘 알려진 대로 광군은 거란이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편성된 최초의 전국적인 군사조직으로 그 수는 30만이었다고 전한다. 짐작건대, 이 정도 규모의 군사력이 왕권이 매우 미약했던 당시에 있어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징발에 의해 편성되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아마 실제적으로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지방의 통치를 담당하고 있던 호족들의 징병에 의해 형성된 조직이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광군은 호족연합군의 성격을 지니는 지방군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외적과 직접 전투를 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종의 농민예비군과 같은 조직을 가지고 계속 남아 공역부대로서 기능하였다. 이점은 현종 1년(1010)에 시작하여 동 2년에 완성되는 경북 예천의 개심사 석탑을 쌓는 데 광군이 동원되고 있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광군을 직접 지휘한 것은 지방의 호족(향리)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전체적으로 통제하여 가는 통수부는 개경에 설치된 광군사였다. 따라서 광군은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의 공동지배 위에 이루어진 군사조직」이라고 보아도 좋은데, 이 조직은 고려의 집권화정책이 진전되어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점차 그 독자성을 잃어 갔다. 그 한 큰 계기는 6위가 형성되고 12군절도사제도가 생기는 성종 14년(995)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광군은 위에서 말했듯이 현종 1~2년까지는 그대로 존속했던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이 완전히 재편되어 주현군으로 변모하는 것은 지방관제가 일단락되는 현종 3년부터 9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들은 공역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관계상 주현군으로 개편될 때에도 같은 기능을 가진 1품군과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참고 자료
『고려시대사』(박용운, 일지사, 2008) p351~360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병제사연구』(이기백, 일조각, 1968)
「주현군과 주진군」(조인성,『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고려 양계 주진의 방수군과 주진군」(조인성,『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고려의 북진정책과 진성」(이기백,『군사』1, 1980)
「고려 양계의 도령에 대하여」(김남규,『경남대논문집』4, 1977)
「고려양계의 지배조직」(변태섭,『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71)
「고려 양계의 주진군」(이기백,『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68)
「고려 광군고」(이기백,『역사학보』27, 1965:『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