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민족공동체의식의 탄생
- 최초 등록일
- 2014.10.16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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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제의 제기
2. 고려전기의 상고사인식과 지역수호신으로서의 단군
3. 고려후기 단군의식의 배경: 원간섭기
4. 역사서를 통해 본 단군의식
1) 일연의 삼국유사
2) 이승휴의 제왕운기
5. 사대부의 단군의식 수용
6. 결론 -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는 민족의식의 각성-
본문내용
1. 문제의 제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뿌리가 누구이고 시조가 누구인지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한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사나 사회 교과서를 살펴보면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으며 초등학생 때 한번쯤 들을 법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가사에도 단군이 시조라고 쓰여 있고 10월 3일에는 개천절이라는 등 단군이 한국사에 있어 국조라는 사실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군이라는 존재는 예전부터 국조로 여겨지지 않았다. 본문에 서술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시조를 기자로 설정하거나 삼국의 창건자를 시조로 보았으며 단군은 지역수호신의 일환이었다. 비로소 고려 원간섭기(고려 후기)이후에 들어와서야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후 이성계를 필두로 한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이라는 국호를 지은 것에 대하여 기자조선을 유래로 했다는 이야기와 단군조선을 유래로 했다는 이야기로 나누어지만 어찌했던간에 신흥사대부에게 단군이라는 인물이 인식되었다는 것이 여러 문헌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면 고작 지역수호신이었던 단군이 무슨 일로 고려 이후에 국조로 인식되었으며 조선의 건국자인 신진사대부는 단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2. 고려전기의 상고사인식과 지역수호신으로서의 단군
고려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삼한(三韓) 이전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이전의 역사를 다루더라도 고조선의 시조를 기자(箕子)에서 찾으려 하였다.
숙종 7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의범절은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아직 그가 사전(祀典)에 등록되지 않았으니 그의 분묘를 찾아서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게 하기를 바랍니다.”라 하여 평양에 기자사당을 건축한 사례가 있었다. 외교적 문서에도 이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문종 9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동경유수에게 전달한 국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기자의 옛국토이다”라 하였다. 이밖에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고려의 선조를 기자라 하였고 당나라와 금나라에서 보낸 국서에도 고려는 기자에서 유래된 땅이라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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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
http://www.krpia.co.kr (고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