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와 환향녀의 역사적 사실
- 최초 등록일
- 2014.10.13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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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공녀
(1) 공녀
(2) 공녀요구의 목적
(3) 공녀의 헌납 상황
(4) 공녀의 선발과정
(5) 공녀의 폐단 및 기피실태
(6) 공녀 출발시의 참상
(7) 공녀 중지 운동
(8) 공녀의 운명
2. 환향녀
(1) 환향녀
(2) 환향녀의 남은 여생
(3) 이라크판 환향녀기사
본문내용
1. 공녀
(1) 공녀(貢女)
원(元)·명(明)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 및 조선왕조가 여자를 바치던 일.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골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골은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때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1231년 (고종18)부터 1258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몽골의 고려 침입이 여러차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골을 완젼히 격퇴할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으로도 굴복하지 않아 두 나라 사이에는 화평의 교섭이 진행되고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2) 공녀요구의 목적
원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한 이유를 보면 첫째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고도의 복속정책때문이었다. 즉, 부녀자의 강탈을 통하여 고려인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끊임없이 공녀를 요구함으로써 외교적으로 탄압을 가하는 한편, 더 나아가 고려인들을 그들의 정신적인 노예로 삼으려고 했던것이다.
둘째는, 원나라의 부녀자 부족에 따른 황실궁녀의 조달에 있었다. 즉, 부족한 궁녀의 보충을 위하여 그들은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 고려의 처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나라로 끌려간 대부분의 고려 처녀들은 황제나 황후 등의 궁녀로 일생을 감옥 같은 궁궐에서 보내야 했다.
셋째는, 미모가 뛰어난 고려 여인들에 대한 몽고인의 성적 야욕의 충족 때문이었다. 공녀로 끌려간 처녀들은 궁녀로 뽑히는 외에 황족이나 고관들에게 나뉘어져서 그들의 처, 첩이 되었다. 또한 황족이나 고관들은 직,간접적으로 고려의 처녀를 구하여 처, 첩으로 삼아 성적인 만족을 채우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에 사신으로 오는 자들은 의례히 고려의 처녀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원나라 황제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보내어진 공적인 공녀 못지 않게 황족이나 고관 등이 직접 오거나 간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처,첩을 구하는 사적인 공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는 상관에게 뇌물용으로 바치기 위하여 황제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처녀들을 강탈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 자료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11~13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14~56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57~60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61~65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66~68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 1987 p72~74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 정치․경제생활이야기」, 한국역사연구회 p138
정구선,『공녀』국학자료원,1987 p75~83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43368
이배용,「우리나라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청년사, 1999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AzaCS8LNGqCWiPuR923rsn3
BthdABFmC&qb=yK/H4rPgyKvBprW/
한겨레신문2004년7월15일기사참고
http://www.hani.co.kr/section-007003000/2004/07/0070030002004071518341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