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강독 영락제 번역본
- 최초 등록일
- 2014.10.11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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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初,帝起兵時,漢王數力戰有功。帝許以事成立為太子。既而不得立,怨望。帝又憐趙王年少,寵異之。由是兩王合而間太子,帝頗心動。九年還南京,召士奇問監國狀。士奇以孝敬對,且曰:「殿下天資高,即有過必知,知必改,存心愛人,決不負陛下託。」帝悅。十一年正旦,日食。禮部尚書呂震請勿罷朝賀。侍郎儀智持不可。士奇亦引宋仁宗事力言之。遂罷賀。明年,帝北征。士奇仍輔太子居守。漢王譖太子益急。帝還,以迎駕緩,盡徵東宮官黃淮等下獄。士奇後至,宥之。召問太子事。士奇頓首言:「太子孝敬如初。凡所稽遲,皆臣等罪。」帝意解。行在諸臣交章劾士奇不當獨宥,遂下錦衣衞獄,尋釋之。
영락제가 거병한 후,한왕(영락제의 둘째 아들,주고후)이 여러 번 전공을 세워,영락제가 훗날 그를 태자로 삼겠노라 약속했으나,책봉받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원망하였다.영락제는 또한 아직 어린 조왕(영락제의 셋째 아들,주고수)을 가엾이 여겨,그를 매우 총애하였다.이에 두 친왕이 힘을 합쳐 태자와 영락제를 이간질하였는데,이에 영락제가 크게 흔들렸다.영락9년에 남경으로 돌아온 영락제가 양사기를 불러 태자의 대리청정이 어떠한지 물으니,매우 효심이 깊다고 대답하고, “전하의 자질이 뛰어나니,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깨우칠 것이며,깨우치면 곧 바로잡을 것입니다.또한 항상 사람을 귀히 여기니,폐하를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영락제가 매우 기뻐하였다.영락11년 정월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다.예부상서 여진이 조하를 물리면 안 된다고 간청하였는데,시랑 의지가 조하를 받으면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이에 양사기 역시 송인종을 예로 들어 강력히 주장하였다.그리하여 조하를 받지 않았다.다음 해에 영락제가 북으로 출정하였는데,양사기는 여전히 태자를 보좌하며 수도를 지켰다.한왕의 태자를 향한 공격은 더욱 급박해졌다. 영락제가 돌아올 때,태자가 제 때 영접하지 못하여,그 수하인 황회 등이 모두 감옥에 들어갔으나,양사기는 늦게 도착하여 화를 면했다.그를 불러 태자의 일을 묻자,양사기는 머리를 조아리고 “태자께서는 예와 같이 효심이 깊습니다.영접에 늦은 것은 모두 소신들의 잘못입니다.”라고 하였다.이에 영락제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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