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재조명 - 어제와 오늘의 광해군
- 최초 등록일
- 2014.09.18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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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프롤로그 - “광해군의 부활“
Ⅱ 어제의 광해군
1. 피도 눈물도 없는 패륜아
2. 대동법보다는 궁궐공사를 우선시 한 위선자
3. 경연과 실록편찬을 뒷전으로 미룬 왕
4. 중립 외교 정책의 이면
Ⅲ 오늘의 광해군
1. 중립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한 현인
2. 대동법과 호패법의 실시, 동의보감 편찬, 염전 설치 등을
추진한 정책연구가
3. 왕이라는 굴레에 홀로 남은 외로운 왕
Ⅳ 에필로그 - “진짜와 가짜 광해군”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프롤로그
“광해군의 부활”
요즘 조선왕조 15대 임금인 광해군을 재조명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광해군이라는 역사 속의 인물이 주목 받고 있는 것도 사실 이다. 영화 속의 광해군이 실제로 2명의 다른 인물이라는 설정은 광해군에 대한 극도로 상반된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국왕이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시대 내내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묘호를 받지 못한 비운의 왕이 2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광해군이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일파가 조선후기 내내 집권적 위치에 있었던 상황에서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까지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이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교과서와 역사 관련 서적에서는 광해군을 더 이상 ‘폭군’ ‘혼군’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당시 혼란한 동북아 정세 속에 ‘중립외교’를 통해 조선을 지키려고 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의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과서나 개설서 등에서 광해군을 이처럼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서 부각시켰던 근거는 1958년에 발표된 이병도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광해군이 명과 후금사이에서 취했던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존에 남아 있던 부정적 인식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조적인 양쪽의 평가를 모두 살펴봄으로서 광해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해 보고자한다.
참고 자료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천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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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환.「선조 광해군대 대동법 논의」.『한국학 논총』 제19집.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1997.pp.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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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주. 「광해군의 국내정책의 의미」. 석사학위논문. 인하대 교육대학원. 2005. pp.1~46.
한명기.「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역사비평』 통권 44호. 역사문제연구소. 1998. pp.156~227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 너머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