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려초 왕위계승 문제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惠宗의 즉위 배경과 정치기반
3. 定宗의 정치기반
4. 王規의 왕위쟁탈 모의
5. 맺음말
본문내용
高麗 太祖의 맏아들인 惠宗 王武는 그가 10세였던 태조 4년(921)에 正胤(太子)으로 책봉되면서 일찍이 차기 국왕으로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母系였던 羅州 吳氏는 豪族聯合으로 형성된 고려 정권 내에서 뚜렷한 권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러한 출신 배경은 곧 혜종 즉위 이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번져나갔다.
당시 왕위계승 문제에 개입된 주요 인물로는 크게 王規, 朴述熙, 王堯(定宗)·王昭(光宗) 형제, 그리고 王式廉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왕규는 태조와 혜종 양대에 걸쳐 納妃한 廣州 지역의 유력 호족으로, 혜종을 암살하고 왕의 이복동생이자 자신의 外孫인 廣州院君을 옹립시키고자 했다. 그에 반해 박술희는 ?城郡 출신의 인물로, 태조의 유지를 이어받아 혜종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그로인해 왕규와 박술희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로 지내왔다. 그러나 혜종이 3년도 채 못 되어 죽고 定宗 王堯가 즉위하면서 이들은 곧 정종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되고 만다.
정종은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다. 또한 그의 모계인 忠州 劉氏는 나주 오씨와 달리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든든한 정치기반이 되었다. 한편 태조의 從弟였던 왕식렴은 西京에 주둔하며 북방개척에 앞장섰던 왕실세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경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나갔고, 정종 즉위 과정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규를 제압함으로써 정종의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었다.
이렇듯 당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고려왕조의 불안정한 왕권에서 비롯된 권력투쟁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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