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학]과제 육군가치관(실천사례, 교훈, 실천방안)
- 최초 등록일
- 2014.06.08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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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군사학 강의, 과제, 육군가치관(실천사례, 교훈, 실천방안)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실천사례
2. 교훈
3. 실천방안
본문내용
우리 모두는 백의종군하며 국가에 충성한 인물로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시간 융목(갑옷)을 입고 살았고, 모친의 부음(訃音)을 들었을 때도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가눌 수 없었지만 왜군의 거동이 심상치 않다는 전황을 듣고 모친의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채 전장으로 향했었다.
또한 전장에서 부인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난중일기에 적어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전형을 보여줬다.
원균의 모함으로도 삼도수군총제사의 직위를 상실했음에도 권율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며 국가에 헌신함으로써 진정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마지막 노량해전을 앞두고 "원수를 무찌른 다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맹세하였다.
노량해전에 나가 화살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적의 총탄에 맞았지만 이순신장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한 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셨다.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