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지식인층의 농업개혁론
- 최초 등록일
- 2014.06.06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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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7~18세기 조선의 전반적인 시대배경
1) 17~18세기 조선의 농업 실정
2) 당시 실학자들의 개혁론(유형원, 이익, 정약용)
2. 19세기 농업 실정과 삼정의 문란에 대한 정책
1) 19세기 농업 문제
2) 삼정 개선론
3) 삼정 개혁론
4) 토지제도 개혁론
5) 응지삼정소에 따른 정부의 정책
3. 개혁운동의 결과
4. 마무리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17~18세기 조선의 전반적인 시대배경
1) 17~18세기 조선의 농업 실정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평균 기온보다 3℃나 떨어지는 소빙기 시대였다. 숙종 21년(1695)의 기록을 보면 8월 한 여름 진주지방에 3촌 정도의 눈이 내렸으며 9월초순에는 전국 각지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곧 그 해 벼농사와 과일농사가 흉년인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으며, 결국 그 다음해 보릿고개 때는 곡식가격이 600%폭등했다. 문제는 이런 이상 기온 현상이 단 한해에 그친것이 아니고 몇 년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에 있다. 실제로 숙종21년부터 약 5년동안의 대기근으로 인해 전체인구의 25~33% 정도가 사망했다. 당시 전체인구를 약 1600~1200만으로 예상한다면 약 400만명 이라는 엄청난 사망자 수를 생각할 수 있다. 대기근의 심각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대책으로 유기아 수양법을 제정하고 청으로부터 무상 1만석, 유상 2만석의 양곡을 수입했다. 유기아 수양법이란 15세미만의 떠돌아 다니는 아이를 잡아놓으면 노비로 삼아준다는 것으로 그 결과 노비계층의 수가 증가했다.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내는 평민층이 많이 있어야 되는데 대기근으로 평민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그에 따라 나라 재정도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포함한 여러 전쟁과 그로인한 피해로 국토 전체가 황폐해졌고,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피폐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의 농지 면적은 전국적으로 170만 결에 달하였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의 농지면적은 54만결로 줄어들었고, 이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국가의 조세 수입이 감소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 사망하거나 농지 부족으로 일어난 기근, 위생상태의 악화로 생긴 전염병 등으로 약 150만 명에서 200만명에 이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참고 자료
연세실학강좌IV 실학의 정치 경제학[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편)
김용섭, 1974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일조각
김용섭, 1988 (근대화 과정에서의 농업개혁의 두방향) 「한국자본주의성격논쟁」 대왕사
김용섭, 1989 (조선 후기 토지개혁론의 추이) 「동방학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