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과 농장
- 최초 등록일
- 2014.06.06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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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一. 과전법의 발생 원인
二. 과전법의 성립 과정
三. 과전법의 시행과 그 운용
四. 전시과와 과전법 비교
五. 과전법의 쇠퇴와 직전제 성립
六. 농장
Ⅲ. 결론
Ⅳ. 쟁점 & 의견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여러 문제 가운데서 관료층의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제도의 정비와 일반 농민을 위한 부세제도의 정비와 일반농민을 위한 부세제도의 정상화를 우선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토지제도는 몇 차례의 개정과정을 거쳐 문종 30년(1076)에 전시과로 완성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말 전시과제도는 무인집권기 거치면서 점차 제 기능을 잃어가게 되어 대농장이 팽창하게 되었고, 갈수록 재정이 궁핍해지자 당시 권력을 얻은 개혁파가 이를 개선하기위한 토지제도로써 과전법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전법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위한 초기 토지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조선건국의 중요한 초기 토지제도이었던 과전법의 성립과정, 내용 , 변천과정 등... 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一. 과전법의 발생 원인
고려는 이자겸의 난·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전시과제도가 제 기능을 상실하여, 신진관료들에 대한 토지 분급이 어려워지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하여 녹과전(祿科田)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녹과전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대토지 소유 현상에 따른 농장의 확대로 말미암아 기존의 수조권분급에 바탕을 둔 사회경제구조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법적인 대토지 집적현상은 무인집권기에 성행하여 원 간섭기에 이르러 진전(陣田)개간을 통해 더욱 가속화 되었으며, 그 규모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확대되었습니다. 농장은 불법적인 수조지 탈점이나 개간 · 매입 · 기진 등에 의한 소유지 확대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 가운데 불법적인 수조지 탈점과 토지 겸병으로 관료들 사이의 토지 쟁탈은 격화되었습니다. 한 토지의 주인이 여럿이 되는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또한 농민의 소유권을 침탈하여 수조지를 소유지로 만들어 버리는 사전의 가산화(家産化)와 조업전화(祖業田化)가 더욱 확대되어 서전의 폐단은 날로 확산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김태영 ,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 , 지식산업사 , 1983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지식산업사 , 200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중세사 5』, 1975
김진영,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 지식산업사, 1983
박시형, 『조선토지제도사』, 신서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