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4.01.21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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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2. 문학관
3. 조지훈 시 경향
본문내용
1. 생애
조지훈은 19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에서 삼남일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1968년 5월 17일, 4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가문은 10여대 동안 인물과 문한(文翰과) 재력을 갖춘 전통적 유교 가문으로써 그 지방의 학문적 산실이었다. 조부의 슬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월녹서당(月鹿書堂)에서 서당식 교육을 받았을 뿐, 혜화전문학교를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런 그의 동양사상의 체득은 그의 일생의 정신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지훈은 정규적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음으로써 지적인 교양에 있어서는 손해를 보았고, 성격형성에 있어서는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일제의 것이나마 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던들, 학자로서의 그에게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지만, 한편 동양적 내지 한국적 교양인으로서, 지사로서의 성가(成家)에는 불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훈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한 중요한 인물은 그의 형, 세림 조동진이었다. 그는 일제에 항거하는 시를 많이 써서 주재소에 여러 차례 불려 다닌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훈은 세림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하고 <꽃탑(塔)>이라는 문집도 발간한 바가 있다.
1936년 상경한 지훈은 부친을 따라 조선어학회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조선어학회 큰 사전 일을 돕는 활동을 하게 된다. 또한 1937년에도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행해진 거물급 독립투사 일제 김동삼의 장례에 참례한 일이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당시 현실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저항의식이나 민족의식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적 가정환경과 성장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지훈은 시인, 학자, 지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1939년 4월에 <고풍의상>으로 1회 추천을 받은 후로부터 8개월 후인 1939년 <문장>지 12월 호에 <승무>로 2회 추천을 받았고, 1940년 2월 호에 <봉황수>와 <향문>으로 3회 추천을 완료하여 문단에 진출하였다.
참고 자료
논문 조지훈 시의 불교적 상상력과 禪味의 세계
[우리어문연구 33집/우리어문학회/2009.1.30./337-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