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멸망에 관한 주요 학설 및 반박의견
- 최초 등록일
- 2014.01.03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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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교과서에서 서술하는 발해의 멸망
1-1. 기존의 멸망 원인설
(1) 이원적 주민 구성론을 근거로 한 고구려인 vs 말갈인의 불화설
(2) 이원적 주민 구성론에 대한 반박 의견
① 「유취국사」 해석의 오류
② 발해 내 말갈인의 규모 및 고구려 유민의 규모
2. 새롭게 제기 된 멸망 원인설
(1) 백두산 분화설
(2) 거란 급습설-지배층 내분설과 연계하여
3. 결론 및 참고문헌
본문내용
1. 교과서에서 서술하는 발해의 멸망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884)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16대 왕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하는데, 단 15일 만에 거란의 기병대에 상경이 함락되어 초토화 되었다. 발해의 허망한 멸망은 한국 고대 사학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발해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강성했던 발해가 그리도 허망하게 망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 큰 나라가 단지 보름 만에 멸망한 것을 두고 불가사의라 여겼는데, 빈약한 사료로 인하여 발해 지배층의 내분설 및 지배계층인 소수 고구려인과 피지배계층인 다수 말갈인의 갈등을 그 원인으로 간단히 서술하는데 그치는 것이 현실이다.
1-2. 기존의 멸망 원인설
(1) 이원적 주민 구성론을 근거로 한 고구려인 vs 말갈인의 불화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말갈·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이다. 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이기도 하다. 다만 이 말갈을 국가내의 피지배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른 시각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 중 국가 내 불화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는 고구려인이 소수의 지배계층이고 말갈인이 다수의 피지배계층이라는 내용이 주가 된다. 다음은 일본의 역사서인 「유취국사」의 한 내용이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중략)...그 넓이가 2천리이고 주·현의 숙소나 역은 없으나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의 마을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이 적다. 모두 원주민을 마을의 우두머리로 삼는데,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다음은 자사라 하고 이들 마을의 우두머리를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유취국사」中
<이하생략>
참고 자료
고광의 외 10인,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07
진재운, 「백두산에 묻힌 발해를 찾아서」, 산지니, 2008
김종복, 「발해정치 외교사」, 일지사, 2009
주진오 외 7명,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2010
정재준·현창원, 「통합한국사」. 고시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