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의 미아리 고개'에서 듣는 6.25 전쟁의 이별의 한과 당시 트로트의 정치적·사회적 역할
- 최초 등록일
- 2013.12.29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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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6·25 때는 마산 방송국 문예부 책임자로 있으면서 동시에 동료들과 콩쿠르 연다고 집에 쌀가마니 팔아놓고 2~3일씩 지방으로 돌아다니기도 하던 시절이었지. 당시 아내는 미처 서울을 못 빠져 나왔지만 피난민들이 마산까지 내려오고 대단했어요. 그 무렵엔 녹음방송이 아니고 생방송 할 때이기도 했는데 9·28 수복이 돼서 서울에 올라와 집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5살짜리 어린 딸 수라를 업고 화약이 터지는 미아리 고개를 넘던 중 어린 수라가 영양실조로 눈을 감았다는 거야. 어떡해. 애가 죽었으니 이불에 싸가지고 호미로 땅을 파 묻었는데 깊이 묻지도 못했겠지. 그 얘기를 아내에게 듣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만든 노래가 <단장의 미아리 고개>야. 6·25로 인해 어린 수라를 노래 하나와 바꾼 셈이지. 해마다 6·25만 되면 꼭 이 노래가 방송에서 나오곤 하는데 들을 때마다 심장이 찢어져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반야월 작사가가 곡을 만들게 된 계기만 들어도 6·25의 참상이 절절하게 눈앞에, 가슴에 새겨진다. 일제강점기 가혹한 강압적 통치 아래서 민족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한국 사람들은 피로, 눈물로 광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눈물을 닦기도 전에 미·소 냉전체제의 제물이 되어 함께 싸우던 한민족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6·25 전쟁의 고난을 겪었다. 넓게 보면 한민족의 역사는 고대부터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되는 수난의 연속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6·25 전쟁은 피를 나누고 기억을 나눈 우리 가족, 친구, 동료, 이웃 사이에 살육이 일어났으며 결국엔 분단까지 이르렀고 지금도 북한과의 충돌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인 우리의 현실이다.
참고 자료
박성서,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 책이 있는 풍경, 2010,
장유정, 『근대 대중가요의 지속과 변모』, 소명출판, 2012, 184~188쪽 참조
손민정, 『트로트의 정치학』, 음악세계, 2009, 92~101쪽 참조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민속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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