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건축
- 최초 등록일
- 2013.12.19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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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근대 사회의 형성 노력과 건축
1) 서양건축의 유입
2) 개화에 따른 건축적 대응
2. 도시 변화와 건축의 근대성 모색
1) 식민통치시설의 확산
2) 민족자본과 기독교 세력의 서양식 건축
3. 식민지배하의 근대건축
1) 식민지 도시와 도신건축
4. 현대건축
본문내용
서양건축의 유입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개항이 이루어졌다. 개항이 되면서 부산, 인천, 원산에 외국인에 의한 색다른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곧 도성인 서울 한복판에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서양의 교회당이나 공사관 건물은 도성의 경관을 바꾸어 놓는 큰 변화였다.
최초의 외국인 건물은 개항 다음 해인 1877년 부산에 세워진 일본관리청 건물이었다. 원산, 인천에 이어 1884년 서울에 일본의 영사관이 세워졌다. 이들 건물은 외관은 서양식이었지만 구조는 모두 목조였다. 일본인들이 서양식 건물을 흉내내어 목조로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목수 등 기술자들이 부산이나 서울에 와서 작업을 했다.
뒤이어 중국, 영국, 독일인 등이 인천에 자신들의 거주지에 주택을 짓거나 또는 상업 목적의 건물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서양식 건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1884년에 독일인에 의해 세워진 인천 세창양행은 2층 벽돌조 건물로 전면에 4각 기둥의 개방된 아케이드를 둔 별장풍 건물이었다. 전면의 개방된 아케이드는 유럽인들이 아시아 식민지 일대에 세운 건물들과 맥을 같이한다.
구미 각국의 공사관은 처음에는 한옥을 개수하여 사용하다가 1890년대 들어와서 본격적인 서양식 건물조성 단계로 들어섰다. 1892년 영국영사관의 준공에 이어 러시아 공사관(1895년), 프랑스 공사관(1897년), 독일 영사관(1901년), 이탈리아 공사관(1901년), 벨기에 영사관(1905년)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영국 영사관이 벽돌조 2층의 온건한 건물인데 비해 러시아 공사관은 크고 장대한 외관을 가졌다. 건물 한쪽에는 종탑을 높이 세웠다. 프랑스 공사관은 당시 정동에 세워졌던 외국 공사관 중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건물로 평가되는데 한쪽에 5층 높이의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에 변화있는 벽면과 정교한 세부장식을 가미했다. 이 건물은 서대문과 서소문 부근 성 밖에서도 독특한 외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벨기에 영사관은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2층의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한 안정된 비례감을 갖춘 건물이다.
참고 자료
우리문화 이웃문화 [신영훈-문학수첩]
한국건축의 역사 [김동욱-기문당]
한국건축사 [윤장섭-동명사]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 [윤일주-기문당]
서울문화 (http://www.metro.seoul.kr/kor2000/seoulguide/seoulart/place/historical/cont2.html)
서울대백년사(http://seoul600.visit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