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태조 광종 성종의 정책
- 최초 등록일
- 2003.05.12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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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자, 각주 되어 있어여.^^*
목차
Ⅰ. 들어가며
Ⅱ. 태조의 대호족정책
Ⅲ. 광종의 왕권강화책
Ⅳ. 성종의 체제 정비
Ⅴ. 나오며
본문내용
Ⅱ . 태조의 대호족정책
태조가 건국한 후 그에게 부과된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을 회유·억압하는 일이었다. 그가 새로이 나라를 열었다 하나 지방 각처의 호족들은 후삼국의 혼란시대와 다름없이 독자적 무력과 경제적 지반을 보유하여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 왕건과 전장에서 고락을 같이한 호족출신의 諸將(제장)들도 전쟁에 의한 포로, 노획물 등의 이익을 분점하고 사병을 거느린 채 자기의 세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정국의 불안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즉위한 그 해에 왕의 측근 인물인 마군 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의 반역이 일어나고 이어서 다시 마군장군 유흔암의 모역(謀逆)이 발생한 것은 그와 같은 정국의 불안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저항하는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한편으로 그들과의 타협과 연합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우리들이 고려 초기의 정권 형태를 흔히 호족연합정책(豪族聯合政策)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호족들에 대한 몇 가지 시책을 폈다.
첫째, 호족 통합정책으로 결혼정책(왕건은 모두 6왕후 23부인을 두었는데 이 중 경순왕
백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를 제외하면 대체로 지방호족의 딸이다.)을 시행 하였다.
※고려사 황비 열전에 의하면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정략결혼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써 그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호족들의 입장에서도 딸을 왕에게 주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김갑동, 1993,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박용운, 1987, 「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과 발전」, 『고려 시대사(상)』,일지사
김갑동, 1996, 「호족의 대두와 집권화」, 『역사 입문2』, 풀빛
한영우, 1997, 「고려 전기의 정치와 사회」,『다시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고석규, 1996, 「고려의 건국」『역사속의 역사 읽기 1권』, 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