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에 대한 재평가
- 최초 등록일
- 2013.12.01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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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시 시대상을 통해 조광조의 삶을 고찰하고 그동안 저평가 되어왔던 조광조의 업적을 재평가한다.
목차
Ⅰ. 서론 : 당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있는 조광조의 사상적 배경
Ⅱ. 본론 :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
(1) 조광조의 생애
(2) 정치 개혁
(3) 그에 대한 주된 비판과 이에 대한 변론
Ⅲ. 결론 : 조광조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과 그의 진정한 가치
Ⅳ. 참고 자료 및 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 당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있는 조광조의 사상적 배경
조광조는 중종 10년 8월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38세인 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지 4년 동안의 짧은 정치적 활동을 하였지만, 그는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나, 17세가 되던 연산군 4년(1498)에는 무오사화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23세이던 연산군 10년(1504)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25세 때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정국이 바뀌는 소용돌이를 겪게 되었다. 조부 때부터 조선 왕조의 고위관직을 지내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한창 과거 준비에 열중하고 미래의 삶을 계획해야 할 나이에 거듭되는 사회와 연산군의 학정 그이고 전제적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군이 쫓겨나는 쿠데타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조광조 자신은 중종 10년부터 관직에 나아가 개혁을 시도하다가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희생되었다. 이처럼 조광조의 짧은 생애는 사화가 거듭되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격량과 그대로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때 과거에 큰 뜻을 두지 않다가 나이 34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한 것도 이러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관직에 나아간 직후부터 거듭된 사건들로 인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 국가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가 바로 서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즉 왕을 비롯하여 나라의 지배층이 마땅히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배운 대로 실천해야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나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을 때 공자가 올바른 도리를 밝혀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처럼, 조광조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세조의 찬탈도, 연산군의 학정도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의 파행적인 정국도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왕과 신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참고 자료
정두희, 『조광조』, 아카넷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돌베개
구본창,『패자의 역사』, 채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