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훈요십조의 사용 용례
3. 맺음말
본문내용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유훈(遺訓)으로, 죽을 무렵 박술희(朴述希)에게 전해 후세의 귀감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942, 태조 25). 태조의 사상, 정책, 규범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으로, 고려 왕실이 전범으로 삼은 헌장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태조 세가 26년 4월조와 『고려사 절요』태조 26년 4월조에 실려 있는데, 당시 상황을 기록한 『고려실록』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훈요십조」가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를 통해서 후대에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의구심은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훈요십조」를 태조가 직접 친필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태조의 말을 박술희가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태조의 뜻이 담겨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또한 거란 침입이후 태조의 유훈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하여 최제안이라는 자가 전했다는 상황도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훈요십조」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위의 두 가지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 졌다. 첫 번째로는 훈요십조의 자체의 의미에 비중을 둔 이정신의 「고려 태조의 건국이념의 형성과 국내외 정세」, 허중권의 「고려초기 유교정치사상의 형성과정에 관한 일고찰; 조서와 봉사를 중심으로」, 장일규의 「나말여초 지식인의 정치이념과 훈요십조 ? 최원위의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 김호동의 「신라말 고려초 유교정치이념의 확대과정」등이 있다. 이들은 「훈요십조」를 통해 태조 왕건의 정치사상 및 건국이념을 분석함으로써 훈요십조가 고려사회 혹은 고려왕조에서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훈요십조」가 위작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사실 이 연구의 시작은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마니시 류는「高麗太祖訓要十條に就きて」에서 8조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훈요십조의 위작설을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이마니시류(今西龍), 「高麗太祖訓要十條に就きて」, 『高麗及李朝史硏究』國書刊行會, 1974.
허중권, 「고려초기 유교정치사상의 형성과정에 관한 일고찰 소서와 봉사를 중심으로」, 『사학지』26, 단국대학교사학회, 1993
김석근,「「훈요십조」와「시무 28조」 : 고려 전기(前期) 정치사상에 관한 소묘(素描)」,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 연구』, 제 101호, 1996.
이재범.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대한 재검토」. 『성대사림』12,13.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1997.
김갑동. 「왕건의 ‘훈요 10조’ 재해석 위작설과 호남지역 차별」. 『역사비평』 60. 서울: 역사문제연구소, 2002.
이정신, 「고려 태조의 건국이념의 형성과 국내외 정세」, 『한국사연구』118, 한국사연구회, 2002.
조련걸, 「고려 초기의 유교정치이념에 관한 연구 :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중심 으로」, 『대한정치학회보』 제12집, 대한정치학회, 2004년
김호동, 「신라말 고려초 유교정치이념의 확대과정」, 『한국중세사연구』18, 한국중세사학회, 2005.
장일규, 「나말여초 지식인의 정치이념과 훈요10조 : 최언위의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제104호, 진단학회,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