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학기 동안 열씸히 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제천의병과 동학농민과의 관계
1) 사족사회의 구성과 하층민의 동향
2) 의병의 출범과 동학농민의 동향
3. 가흥전투와 김백선사건
4. 맺음말
본문내용
한말의 의병전쟁사에서 제천의병은 상징적 존재이다. 비록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공세에 밀려 중부지역의 근거지를 상실한 채 요동행을 결행하고 말았으나, 전기 의병 가운데 최대의 규모로 최대의 전과를 올린 義陣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제천지역에서는 매년 ‘제천의병제‘를 계최함으로써 대대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해 고장의 역사에 대한 고취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반외세에 항전한 선인들의 역사의식을 승화시키고 있다.
제천의병은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직접적인 계기로 그동안 산재해왔던 외세와의 여러 가지 모순속에 위정척사론을 대표하는 華西學派 계열의 毅菴 柳麟錫을 중심으로 하여 제천 장담에서 논의되어 결성되었다. 제천의진의 총수로 추대된 유인석은 충청북도는 물론 인근의 강원도■경기도■경상도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 규합하여 군세가 1만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제천의병은 충청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관찰사를 처단하는 등 을미의병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평가되는 전적을 수립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김하락 등이 이끄는 이천의병을 패퇴시킨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는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제천의병을 공격의 목표로 삼게 됨에 따라 제천의병은 점차 수세에 몰려 충주■제천일대의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고 결국 1896년 8월 28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행을 단행하고 말았다.
이러한 제천의병에 대한 연구는 의병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진척된 편이다. 그러나 의암 유인석을 비롯한 화서학파의 사상을 봉기의 배경으로 검토하거나 몇몇 대표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항쟁의 추이에 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직접적인 전투역할을 수행한 평민들의 활약상과 그 의식구조에 대한 연구는 빈약한 편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천의병의 대부분의 구성원을 차지한 평민들의 구성관계, 그리고 의병과 동학농민과의 관계를 조명해보고 金伯善의 처형과 직결된다고 여겨지는 제천의병의 병신년(1896) 2월에 있었던 可興전투를 통해 보수 유생층과의 내부적 모순문제를 검토해봄으로써 유생층과 대변되는 반외세 반봉건적인 민중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1. 김도형, 〈한말 의병전쟁의 민중적 성격〉, 《의병전쟁연구 상》, 지식산업사, 1990.
2. 김상기, 〈갑오·을미의병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0.
3. 김호성, 《한말 의병 운동사 연구》, 고려원, 1987.
4. 구완회, 《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5. 구완회, 〈1896년 제천의병의 가흥전투와 김백선〉, 《조선사연구》4, 형설출판사, 1995.
6. 구완회, 이창식 편, 《제천의병의 종합적 이해》, 백산출판사, 1996.
7. 이영호, 〈농민전쟁 이후 농민운동조직의 동향〉, 《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8. 이원희, 〈제천지역의 을미의병 연구〉,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9. 이이화,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길사, 1994.
10.조동걸, 〈의병운동의 한국민족주의상의 위치(상)〉, 《의병전쟁연구 상》, 지식산업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