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권 제2
- 최초 등록일
- 2013.08.18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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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무왕 법민
2. 만파식적
3. 효소왕 대의 죽지랑
4. 성덕왕
5. 수로부인
6. 효성왕
7.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8. 혜공왕
9. 원성대왕
10. 흥덕왕과 앵무새
11. 신무대왕, 염장, 궁파
12. 제48대 경문대왕
13. 처용랑과 망해사
14.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15. 효공왕
16. 경명왕
17. 경애왕
18. 김부대왕
19.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20. 무왕
21. 후백제와 견훤
22. 가락국기
23. 거등왕(居登王)
24. 마품왕(麻品王)
25. 거질미왕(居叱彌王)
26. 이시품왕(伊尸品王)
27. 좌지왕(坐知王)
28. 취희왕(吹希王)
29. 질지왕(銍知王)
30. 겸지왕(鉗知王)
31. 구형왕(仇衡王)
본문내용
문무왕은 용삭 신유년 661년 즉위해서 무진년 668년 군대를 데리고 김인문, 김흠순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으며, 당시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臧王)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당나라 잔병들이 신라를 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고종이 김인문을 옥에 쳐 넣고 군사 50만 명으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당나라 유학 중이던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김인문을 만나고 신라 공격 가능성을 의상에게 알려 주었으며, 의상이 신라로 귀국해서 왕에게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국경 바닷가 부근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각간 김천존(金天尊)의 조언으로 명랑 법사(明朗法師)의 비법으로 “곱게 물들인 비단으로 임시 절을 만들면 됩니다” 라고 했고, 그렇게 절을 짓고 신상(神像)을 만들고 명랑 법사를 주지로 명승 12명이 임명되었다. 그 결과 당나라 군대의 배가 풍랑에 모두 침몰했으며, 절은 다시 고쳐 지어 사천왕사로 개칭되었다. 신미년 671년 당나라 군사 5만 명에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다시 정벌토록 했지만, 마찬가지로 명랑 법사의 비법으로 당나라 배들을 침몰시켰다. 고종이 김인문을 풀어달라는 강수(强首) 선생의 표문에 감동하여 김인문을 사면하고 신라로 돌려보냈으나 오는 길에 바다에서 사망했다.
문무왕은 21년 즉위 후에 영륭(永隆) 2년 신사년 681년 사망했으며, 죽기 전 지의 법사(旨義法師)에게 사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므로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무덤을 만들 것을 유언했다.
무진주 관리 안길(安吉)이 기인 제도(지방 관리가 중앙 여러 조를 1년 동안 지키는 제도)에 따라 서울에 와 두 절 사이에 있다는 단오 거사의 집을 찾다가, 어느 노인의 조언대로 두 절 사이에는 궁궐이 있고, 단오 거사는 차득령(車得令) 공(公)이라고 추측되며, 궁성 서쪽 귀정문(歸正門)에 드나드는 궁녀에게 이야기할 것을 권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