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학살 기록
- 최초 등록일
- 2013.07.12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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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보도연맹원학살사건
2. 형무소집단학살사건
3. 북한지역학살사건
4. 보복학살사건
5. 기타학살사건
6. 학살책임
7. 미군민간인학살사건
8. 인민군학살사건
9. 민간인학살사건자료
본문내용
보도연맹원학살사건
이승만 정권이 1949년 4월 21일 “남로당 등 남한 내 좌익세력을 전향시켜 선량
한 국민으로 육성하겠다”며 국민보도연맹(National Guidance Alliance)을 창설시켰다. 새로운 반공 조직으로 등장했으며 과거 좌익 경력자들을 전향시킬 목적이었다.
조직의 설립 취지 역시 “공산주의 사상과 조직의 배격 및 북한정권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박헌영 도당의 몰락을 도모하고 남로당 잔존 세력의 박멸을 목표로 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양심서”를 작성해서 대개 5~10여 명씩의 자신이 관계한 세포 조직 구성원들을 적어냈으며, 좌익 첩자에 대한 정보 수집과 남로당원 체포 등이 그들의 일이었다. 서울시 경찰국에 보도연맹 중앙본부를 설치하고,서울시장, 서울지검장 등이 고문이었으며, 총재, 고문, 참사관, 명예이사장 등 주요직책이 입법·사법·행정 3부의 최고위급이었다. 조직 운영은 연맹원 회비, 기부금,그리고 조직 사업으로 이루어졌으며, 연맹원 등록비 500원, 가입 후 매달 수입의 2%를 회비 조로 납부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예외가 인정되었다.
<중 략>
한국군이 북한 지역에서 저지른 학살을 “공산주의자 사냥”(Communist Hunting)
이라고 한다.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과 남았던 사람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황해도 사리원학살사건은
1950년 12월 8일자 재팬 뉴스(Japan News) 보도 기사로, 12월 7일 사리원 기차역 근처에서 한국 경찰이 재판 없이 정치범 56명을 사살했다는 내용이다. 한국 경찰이 철길을 따라 민간인 70명가량을 줄지어 끌고 갔으며 그 가운데 17명이 죽지 않은 채로 미군에게 발견되어 미군 군의관의 응급 처치 후에 트럭을 통해 화물 열차로 실려 내려갔다. 철수 당시 사리원에는 정부와 경찰 책임자들이 모두 떠난 이후이며 거리에는 어슬렁대는 경찰관들만이 남아 있었다.
<중 략>
1950년 10월 8일 경기도 남양주 창현에서 서울과 개성 지역 민간인 1천 8백 명
이 학살되었다고 인민군 포로가 진술했다. 주민들은 UN군을 우호적으로 대했다는 이유로 헐벗은 상태로 손이 묶여 평양까지 끌려가 군사학교 건물에 수감되어 사살 되었고 근처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했다. 대전형무소사건은 인민군의 학살 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으며, 피해자 대부분이 민간인들로 5천~7천 5백 명이 학살되었고, 미국인 42명과 한국군 17명도 살해되었다. 1950년 9월 23일 학살이 시작되어 한 번에 1백~2백 명씩 살해되었다. 이 학살로 주민 3명, 한국군 1명,미군 2명 등 총 6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참고 자료
김기진, 『미국 기밀문서의 최초 증언; 한국전쟁과 집단학살』(서울: 푸른역사,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