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사건과 우리 내면의 성욕, 그리고 유학적 관점에서의 결론
- 최초 등록일
- 2013.06.16
- 최종 저작일
- 2013.06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성균관장의 횡령비리사건이 터진지 얼마 되지 않아,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윤창중 같은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나는 이런 사건을 볼 때면, 나도 그 상황이 되면 충분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어느정도 확신(?)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나의 마음상태를 미루어 판단해 보건대, 모든 사람이 ‘잠재적 윤창중’이라고 해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윤창중을 비난하며, 그 반대급부로 ‘자신은 그렇게 나쁜사람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얻고 싶어한다. 즉, 자신은 저렇게 추잡한 범죄인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렇게 더럽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 략>
힘들어도 미소를 짓자. 등등)에서 그 간접적이나마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이 됨으로써, 인간관계가 더 확장되어, 좀 더 멋있고,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게되고, 그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기대나 필요를 가지고 물어보는 ‘심문’은 매우 생명력있고 활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심문을 과정을 지나면 신사가 나온다. 사실 신사는 명변과 뗄 수 없다. 신중이 사고한 결과가 명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심문이나 신사, 명변의 과정은 단순히 ‘이해’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사실이고, 정말로 이것을 실천하게 된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