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 경제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13.06.16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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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서양중세 봉건사회
1)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성립배경
2) 봉건제도의 구조
3. 농민경제의 발달
1) 농업기술의 발달
2) 개간의 확대
3) 상업의 발달과 농민경제
4. 중세의 도시
1) 도시의 특징
2) 도시의 발전
5. 십자군 전쟁
본문내용
게르만족은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경부터 로마로 유입하기 시작했다. 이들 게르만족은 초기에는 평화적으로 유입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력침공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런 게르만족은 점차 로마제국을 잠식해 들어갔고 결국에는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 이후 서로마제국의 영토에는 수많은 게르만부족에 의해 각각 다른 나라들이 건립되었다. 이 국가들을 대부분 단명했는데 그 중에서 살아남아 서유럽 지배하게 된 국가가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왕국은 메로빙거왕조,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진 후 843년 베르됭 조약 따라 장남 로타르의 중부제국(로트링겐·부르군트·북이탈리아), 차남 샤를 2세의 서프랑크왕국, 3남 루트비히의 동프랑크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인은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역적 기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의 통제권이 붕괴되고 이슬람, 마자르, 노르만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유럽은 혼란상태에 빠졌고 이런 상황에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안정된 서유럽에는 농업기술의 혁신,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인국증가, 개간운동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유럽의 상업과 도시의 발달을 자극했다. 또한 동방과의 원거리무역은 동방사치품과 교환할 모직물산업의 발달을 촉진했다. 이탈링라와 플랑드르 및 북독일지역의 도시가 발전하고 유럽각지에 시장의 그물망이 퍼졌다. 중세도시는 공동체적인 투쟁을 통하여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농노의 신분적 해방에도 기여했다.
<중 략>
카롤링 시대에는 갈기가 어렵고 습한 찰진 토양을 경작할 수 있는 농업기술이 충반하지 못했다는 것이 생산성의 향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간을 가로막는 요인도 되었다. 따라서 위의 농업기술의 발전은 생산성의 향상뿐만 아니라 개간활동에도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
개간활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대부분 새로운 경작지가 기존의 경작지 가장자리에서 개별적인 개척자들에 의해 소규모로 개간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생산된 경작지는 대부분 고립된 개척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점유되었고, 많은 경우 영주의 감독이 비교적 소홀한 틈을 타서 완전사유지가 되었다. 개간지는 처음에는 풀을 그 다음에는 목초를 생산하였고, 그 뒤에 마침내 곡물경작지가 되었다. 이렇게 농지로 탈바꿈된 개간지는 점진적으로 지속되어 상당한 정도의 면적을 기존의 경작지에 보탤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시오노 나나미,十字軍物語. 3, 송태욱 역, 『십자군 이야기 3』(문학동네, 2012 5.16)
남종국, 「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경제발전」(동국대)
이연규, 「중세 농민경제의 성격과 발전」
이연규, 「중세 유럽에서의 상업과 농민경제」
김병용, 「중세 유럽의 도시와 자유」(조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