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과 후백제
- 최초 등록일
- 2013.06.12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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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떨어지는 초승달
2. 떠오르는 보름달
3. 최고를 향하여
4. 일리천에서 흩어지는 꿈.
5. 그것이 알고 싶다
6. 참고문헌 및 출처
본문내용
반란의 중심세력들은 대부분 신라의 외곽지대인 경기·강원·충청·전라도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들 지역이 이미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반면, 원래 신라의 영토였던 경상도지방에는 약간이나마 신라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이들 경기·강원·충청·전라도 지방이 옛 고구려·백제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즉, 과거 고구려·백제의 판도였던 이 외곽지대의 주민구성은 당연히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에는 고구려·백제의 전통이 농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말기에 혼란이 계속되자 경기도·강원도 이북지방에서는 고구려부흥의 기운이, 전라도·충청도 지방에서는 백제부흥의 기운이 유행하고 있어 누군가 그 기운에 부응하는 목표를 제시한다면 그 지역의 민심을 결집해 장차 큰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중 략>
*운주성 전투(934.9)
전세가 점점 왕건쪽으로 기울면서 왕건의 공세는 더 거세진다. 왕건이 운주성을 공격하자 진훤은 갑사 5천을 이끌고 운주성에서 맞섰다. 견훤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왕건은 거부, 오히려 유금필에게 기병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휴전을 노렸던 견훤의 군대는 격파 당했고 3천명이 전사, 견훤의 참모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최필, 상달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왕건은 패권주도를 더욱 굳혀나갔고 더불어 통일의 승기를 잡게 되었다.
*일리천 전투(936.9)
견훤을 쫓아내어 왕위를 얻은 신검은 후백제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위시하고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리천(경북 선산)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대가 8만명이 넘었을만큼 후삼국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동원한 통일전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검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참고 자료
한국사신론, 이기백 (일조각)
한국사통론, 신형식(개정판)
「고등학교 국사」국사편찬위원회,
진훤이라 불러다오, 이도학
궁예 견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역사스페셜: 제156회[20020504] “17m 거북바위의 증언-견훤의 왕도” 편
역사스페셜: 제118회[20010616] “견훤,.왜.몰락했는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