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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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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매헌 윤봉길의사의 약력
Ⅲ. 매헌 윤봉길의사의 거사
Ⅳ. 매헌 윤봉길의사의 기념활동
1. 광현당
2. 저한당
3. 부흥원
Ⅴ. 매헌 윤봉길의사의 한인애국단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일본인 식민자사회는 조선?만주의 그 어느 것이나 극단적인 관존민비의 사회였고 군인과 관료의 천하였다. 이들을 둘러싸고 독점기업 사원들과 상인들, 온갖 비생산적 노동자 대군이 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어디에도 일본인 거지는 없었다. 식민지 1세가 2세가 되고 3세가 된 조선에서의 일본인 식민자들은 차츰 권력과 영광을 잃어가고는 있었으나 마차꾼이나 짐꾼 따위의 육체노동자는 없었고, 따라서 압박받는 "계급"이라는 생각은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식민지 1세들에게 식민지는 거기서 얻은 부(富)를 고향으로 가져가기 위해 마련된 땅을 의미했을 것이다. 해외로 나온 일본이민은 어디서나 일본 본국의 연장선상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민들이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면 고향사람들이 그 돈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도 타향에서의 생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 모멸감을 품었고, 따라서 그들은 본국인에게서 멸시당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중 략>
조선인 단체의 결성 움직임은 유학생의 집결지인 토오쿄오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조선유학생학우회’와는 별도로 1920년에 조직된 ‘조선고학생동우회(이하 동우회)’는 선구적인 단체였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유학생단체나 친목회, 향우회 등의 성격을 갖는 단체는 있었으나 계층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어 조선인을 결속하고자 한 단체는 ‘동우회’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이념이나 지향성에 상관없이 모든 유학생이 가입한데 비해 ‘동우회’는 신사조를 받아들인 유학생이 주체가 된 학생과 노동자를 위한 단체였다. 1910년대 말부터 유학생 가운데 고학생의 수가 늘어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 노동자와 유학생의 구분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재일조선인이 노동자와 학생으로 대별된 상태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조직적인 결합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동우회’는 1920년 결성 당시에는 노동자와 학생의 상호부조, 직업소개, 단결과 자각을 위한 고취 등을 사업목적으로 내걸어 단순한 친목단체 이상의 성격을 나타내지 못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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