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 조일관계 -임진왜란 이전, 임진왜란,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까지-
- 최초 등록일
- 2013.04.16
- 최종 저작일
-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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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 시기 조일관계(조선, 일본)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조일관계, 임진왜란 이후의 조일관계까지 분석한 글입니다.
양국간 관계 속에서 쟁점이 되었던 왜구, 외교와 무역, 전쟁, 통신사(회답겸쇄환사)에 대해서도
글 속에서 함께 다루었습니다.
기말과제로 제출하여 성적 에이뿔 받았습니다.
목차
1. 임진왜란 이전 조일관계
1) 교린(交隣)체제
2) 왜구문제와 왜변(倭變)
3) 외교와 무역
2. 임진왜란
1) 일본 국내의 정세
2) 임진왜란의 발발과 경과
3) 명군의 참전과 강화교섭
4) 정유재란
5) 임진왜란이 각국에 미친 영향
3. 임진왜란 이후 조일관계
본문내용
1. 임진왜란 이전 조일관계
1) 교린(交隣)체제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무렵 일본에서는 무로마치(室町)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에 의해 남북조(1336~1392)의 내란이 끝나고 통일되었다. 그러나 아직 무로마치 막부가 외교권까지 완전히 장악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과 국가 대 국가로서 외교를 맺지는 않고 있었다. 대신 규슈지역과 서일본의 호족들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통교하였고, 조선은 고려 말부터 큰 피해를 입힌 왜구의 금압을 위해 이들을 후대했다. 그러다가 조선과 일본이 각기 1403년과 1404년에 이 시기 동아시아 세계의 힘의 축인 명나라의 책봉을 받게 되면서 두 나라 사이 관계도 급진전되었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이었다.
<중 략>
1811년 통신사는 장군이 있는 에도가 아닌 대마도로 파견되어 장소를 바꾼 통신이라 하여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 한다. 막부가 많은 경비를 지출하며 그동안 통신사를 초빙해 왔던 건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물론 중국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811년 당시에는 막부의 권위도 높아졌고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중국과 조선이 일본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18세기부터 일본에서 국학이 재조명 되면서 국수주의가 증폭되고 일본 고대사와 고전연구를 바탕으로 조선과 중국을 깎아내리며 통신사 초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통신사는 1811년 대마도에서 행해진 역지통신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그리고는 그 후에 네 번이나 연기되다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알리는 일본 측의 서계가 문제가 되어 260여 년간의 교린관계는 붕괴된다.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각 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300명에서 500명이 넘는 대사절단이며 8개월에서 1년에 걸치는 대장정이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그리고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해로로, 오사카에서는 다시 육로로 에도까지 왕래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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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9, 1995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이영 김동철 김근우 공저, 『전근대한일관계사』,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9
동북아역사재단, 『역사 속의 한일관계』, 청운사, 2009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고즈윈,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