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항일운동,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미군입도, 미소공동위원회,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5 10단독선거반대투쟁,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구국투쟁위원회
- 최초 등록일
- 2013.04.16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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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항일운동
Ⅱ.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조공제주도위원회
1. 조공 제주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관계
2. 조공 제주도위원회의 활동
Ⅲ.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미군입도
Ⅳ.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미소공동위원회(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
Ⅴ.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3 1기념준비위원회
Ⅵ.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5 10단독선거반대투쟁
Ⅶ.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구국투쟁위원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의 항일운동
일본 제국주의의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자국 자본의 운동논리에 맞추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 그리고 병참기지화정책 등을 통하여 조선의 농업과 산업 및 제 자원을 수탈하였고,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정치와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통하여 조선 민중을 철저히 억압하였으며, 더 나아가 노예화교육, 황민화운동 등을 통하여 조선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악랄한 식민지지배는 결국 조선 민족의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알제의 조선지배 시기는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 민족의 줄기찬 투쟁과 여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점철되어진다.
제주도에 대한 일제의 지배도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하여 제주도내의 역둔토 및 민간지 등을 약탈하였고,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하여 제주도내의 역둔토 및 민간지 등을 약탈하였고, 누에고치, 면화 및 어장 등을 수탈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제주도를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여, 섬 전체를 요새화하면서 도민을 수탈하였다. 동시에 일제는 이러한 수탈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제주도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도제는 실시하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독점함 도사를 파견하여 제주도 민중을 철저히 억압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도민은 살 길을 찾아서 일본 등지로 유랑하기도 했으나, 한편에서는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고 있었다.
일제통치에 대한 제주도 민중들의 투쟁은 1908년의 의병투쟁, 1918년의 보천교사건 등을 통하여 줄기차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때를 같이하여 제주도에서도 3월 21일 반일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김시범과 김장환 등 13명이 주도하는 약 500 ~ 600명의 도민은 조천의 속칭 미밑동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제주읍과 함덕 방면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때 연락을 받고 출동한 무장경찰 수십 명이 군중과 대치함으로써 한대 험악한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총검의 위협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앞장섰던 김시범, 백응선 등 13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갈구하는 도민의 의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22일, 23일 그리고 24일에도 계속하여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이 결과 독립운동은 전도로 확산되어 약 4,450여명의 도민이 이 운동에 참가하였고, 여기에 놀란 일제는 육지로부터 응원부대를 요청하여서야 도민의 반일 독립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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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심, 제주4·3항쟁에 관한 연구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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