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왕권 이념][신라 왕권][고구려 왕권][조선 왕권][신라][고구려][조선][왕][국왕]왕권의 이념, 신라의 왕권, 고구려의 왕권, 조선의 왕권 분석(왕권, 신라,고구려)
- 최초 등록일
- 2013.04.16
- 최종 저작일
- 2013.04
- 2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7,500원
목차
Ⅰ. 개요
Ⅱ. 왕권의 이념
Ⅲ. 신라의 왕권
Ⅳ. 고구려의 왕권
1. 제1대 시조 동명성왕
2. 제2대 유리명왕
3. 제3대 대무신왕
4. 제6대 태조대왕
5. 제8대 신대왕
6. 제9대 고국천왕
7. 제10대 산상왕
8. 제12대 중천왕
9. 제15대 미천왕
10. 각 왕들의 기사
Ⅴ. 조선의 왕권
1. 제사권
2. 정치권력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서는 모든 권력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국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 관료들의 분열을 막고 국가의 강한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반역음모나 붕당조성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극형이 따를 뿐이었다. 왕조체제의 계속성을 위하여 왕통은 절대시 되었고 왕위는 종법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양반관료의 공동이익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장치였다. 이런 면에서 국왕은 양반관료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왕은 세습되었고 관료들은 시험을 통하여 뽑았기 때문에 관료가 왕보다 우수하였다. 그들은 교묘한 제도를 만들어 왕권을 제약하였다. 대간(臺諫)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잘못을 목숨을 걸고 간쟁(諫諍)하였고, 경연(經筵)?서연(書筵)제도를 통하여 국왕이나 왕세자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였으며, 사관(史官)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중 략>
2. 정치권력
국왕은 국가의 首長이었기 때문에 모든 정치권력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물론 국왕 혼자서만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양반 관료들의 보좌를 받아야만 하였다.
국왕은 우선 국가를 대표하여 他國과의 外交를 수행하였다. 조선 시대에 隣接國과의 外交는 事大와 交隣으로 대별되었다. 조선은 오직 명나라에 대해서만 事大外交를 폈다. 이것은 국가의 일차적인 大義名分이기도 하였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諸侯의 나라로 규정되어 있었다.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세계관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漢族國家가 아닌 경우에는 비록 중국을 통일하였더라도 마음속으로 事大는 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예가 그러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서자 조선은 오히려 동아시아 문화의 주인은
참고 자료
김병곤(2002), 삼국시대 중앙집권적 왕권의 등장에 따른 지배이념의 채택, 한국사연구회
김병곤(2000), 신라 왕권의 성장과 지배 이념의 연구, 동국대학교
이인철(2003), 신라의 왕권과 정치구조,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정종태(1995), 고구려형성과정에 대한 일연구 : 초기 왕권의 성격변화를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장효정(2000), 고구려왕의 평양이거와 왕권강화, 역사실학회
진희권(2008), 조선에서 왕권과 역사기록, 경기대학교 법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