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과 그 의의, 영향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2.12.19
- 최종 저작일
- 2012.10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프라하의 봄’은 원래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부터 시작된 매년 5월 12일부터 6월 1일에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벌어지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을 의미한다. 이 페스티벌의 개막연주에는 항상 당대에 체코를 대표하는 지휘자가 지휘를 맡고, 체코를 대표하는 악단인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이 연주를 하며, 현직 대통령이 스메타나 홀의 화려한 대통령 전용 발코니에 임석하는 관례를 가지는 오랜 음악 축제였다. 하지만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 민주화 운동이 소련군의 개입에 의해 와해되는 와중에도 페스티벌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프라하의 봄’을 동구권 개혁의 상징으로 부르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소련의 붉은 군대를 해방군으로 맞이하며 민족 전선1)을 통해 공산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후 소련이 주도하는 코메콘2)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하며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소련이 설정한 블록에 편입되고 이에 맞춰 공산 국가가 되어갔다.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시점과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정치적 탄압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 창작의 자유,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3),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고,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으며, 공산당 내에서도 보수파의 주도하에 개혁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 사회주의 헌법을 완전히 공표함에 따라, 국가의 공식 명칭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고, 이론상으로는 공산 사회의 진입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도래와 공산 사회로의 진입은 이론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전후에 성장한 새로운 세대들은 이론과 실제, 정치적 선언과 실제적 국민 생활의 괴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공산 정권이 시행하는 교육을 받았지만, 보다 많은 교육을 받았고, 대부분 비당원이었으며, 체제에 비판적이고 비우호적이었다.
참고 자료
권재일, 체코슬로바키아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5
이주영 외 3인 공저, 서양현대사, 삼서원, 1997
크리스 하먼,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갈무리, 1994
고가영,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저항운동」 서양사론 106권, 한국서양사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