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황산벌 전투
- 최초 등록일
- 2012.12.10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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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황산벌 전투
목차
Ⅰ. 머리말
Ⅱ.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배경
Ⅲ. 황산벌 전투
Ⅳ. 황산벌 전투의 두 라이벌
ⅰ. 계백
ⅱ. 삼국 통일을 완수한 화랑 김유신
Ⅴ. 황산벌 전투의 결과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과제로 처음 보게 된 영화 황산벌. 이것이 나의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는 멀까? 영화를 보기 전 까지 난 이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 의자왕이 즉위 이후 고구려와 연합하면서 신라를 공격해 642년부터 대야성을 비롯하여 남부 지역 40여 성을 함락시키자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가 김춘추를 당에 보내 군사동맹을 체결함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양국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다. 영화에서 보이는 단순히 재미있기 만한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따라서 난 황산벌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Ⅱ.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배경
7세기 중반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이 심해지자 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당 역시 여러 차례의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자 백제를 선제공격하기로 하여 당과 신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660년 3월에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시켜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둥 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써 황산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 략>
이를 들은 김유신은 아버지께 허락을 맡고 적장으로 뛰어들어 적들의 머리를 베어들고 돌아왔고 이를 본 신라군들은 사기를 충전하여 일제히 달려 나가 고구려군을 항복시켰다. 선덕대왕 11년에 백제가 대량주를 격파하였을 때 춘추공의 딸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여 춘추공이 장차 떠날 때 유신과 맹세를 하였고 후에 유신은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태종대와 7년에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들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로 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 나갈 수 없었고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켜 당군과 신라군이 합동으로 백제를 멸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의 공이 많았으므로 당나라 황제가 이를 칭찬하고 포상하였으나 유신은 받지 않았다. 이후 용삭 원년에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용삭 3년에 백제를 구원하러온 왜병을 격파 시키면서 승승장구 하였다. 그러다 결국 문무대왕 13년 7월 1일에 자신의 방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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