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려의 토지제도인 전시과 제도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 대책인 과전법이 성립하게 된 과정과 과전법의 문제점, 그리고 그 의의에 대한 리포트 입니다.
A+ 받은 리포트 입니다. ^^
목차
Ⅰ. 서론
Ⅱ. 과전법의 성립배경
1) 고려시대 전시과의 문제점
2) 과전법의 성립과정
Ⅲ. 과전법의 내용
1) 수조지 분급규정
2) 수조지 관리규정
3) 조세에 관한 규정
4) 수조권자와 농민의 관계 규정
Ⅳ. 과전법의 의의와 실시 후의 문제점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의 · 식 · 주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의 · 식 · 주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추측해 시대상황을 유추하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기도 하고 그 것을 사회 경제사라고 한다.
의 · 식 · 주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사람의 목숨과 가장 연관이 깊은 것은 ‘식’이다. 먹을 것이 없다면 생명유지 조차 되지 못하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근대 이전에도 그랬고 중요도의 비중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면 현재의 삶에서도 먹는 것 즉, 음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렇듯 먹는 것의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는 토지의 중요성이 근대 이전에는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토지제도를 제정함으로써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꾀해왔다.
또한 위와 같은 기본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기반이나 재정기초, 그리고 농민지배 등이 모두 토지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의 소유여부는 사회계급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되었고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필수적 요소였다. 이런 이유로 토지제도를 제정하고 제정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중 략>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 10분의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양반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이어서 16세기중엽에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그 뒤 성종 때는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수관급제(官需官給制)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양반 지주들의 농장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16세기 중엽인 명종 때는 마침내 직전법마저 폐지되고, 관리들은 녹봉만 받게 되었다. 이제 사적 소유권과 병작반수제에 입각한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었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는 소멸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가 확산되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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