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과 명의 대외관계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전기의 조·명관계
3. 임진왜란과 조·명관계의 변화
4. 임진왜란시기 조·명의 문화교류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조선과 명의 대외관계에 대해 주로 문헌상의 자료로 체계를 잡았고 각종 자료와 참고문헌, 논문위주로 서술 하였다. 우선 대외관계를 다루기 전에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아야 한다. 조선과 명나라의 대외관계를 규정하는 원칙이 ‘조공-책봉체제‘ 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인의 세계인식에서 대표적인 사고방식은 천원지방관(天圓地方觀)과 중화주의적 세계관(中華主義的 世界觀)이었다. 특히 조선의 개국과 함께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채택되면서 후자의 세계관이 중심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대외정책을 펼치게 되는 것이며, 중화주의적 화이관(華夷觀)은 고대 중국인의 중화사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이었다. 그들의 문화적 우월의식에 입각하여 한족(漢族)이 살던 지역을 ‘내(內)’, 주변민족이 살던 지역을 ‘외(外)’, 그 종족 및 문화를 ‘이(夷)’로 구분하였다. 처음 문화적 우월관념에서 출발해 종족적·지리적 관념이 결합된 형태로 전개된 중화주의적 화이관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 있다. 조선은 중화주의적 화이관과 사대조공 체제에서는 ‘이적(夷狄)’으로 분류되지만, 유교문화 면에서는 중국과 대등하거나 버금간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화(華)’로 자처하였다.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하여 중화인 명과 일체화시키는 한편 주변국가를 배제하여 ‘이적(夷狄)’으로 간주하였다.
<중 략>
조선전기의 사대론은 시간의 흐름, 조선의 내부상황 변화, 명의 대외정책 변화 등 여러 변수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은 형식상 명의 자주권을 가진 속국일 뿐 실질적으로 속국은 이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은 ‘조공-책봉체제’에서 ‘재조지은체제’로 바뀌며 명나라 덕분에 나라가 살았다는 생각에 서울에 관우묘를 세우고 더욱 명나라를 섬겨서 후에 친명배금 정책을 펴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다. 당시 시대상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조선은 이러한 대외적 관계에서 명에 대해 사대외교 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실리적인 측면과 또 이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었던 부분을 돌이켜 생각하여 오늘날에도 이러한 대외적 관계가 빈번한데 과거를 돌아보고 현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을 펴 우리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 자료
참고문헌
김성근, 『朝·淸 외교관계 변화연구』한국학술정보(주) 2010
박원호, 『명과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박원호, 『조선초기의 요동공벌논쟁』, 『한국사연구』 14, 1976
신석호, 『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관계』, 『국사상의 제문제』 1, 1959.
안정희, 『조선초기의 사대론』, 『역사교육』 64, 1997.
인철호,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 1989.
전해종,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한영우, 『정도전 사상의 연구』, 서울대 출판부, 1973
참고자료 및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한명기(규장각 특별연구원) -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
조재곤(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壬辰倭亂 시기 朝鮮과 明의 문화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