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임진왜란후 조일관계
- 최초 등록일
- 2002.11.28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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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국교회복과 조선통신사 파견
(1) 강화교섭과 조선의 대일정책
(2) 회답 겸 쇄환사의 파견
(3) 기유약조의 체결과 성격
(4)"회답 겸 쇄환사"에서 "통신사"로
3. "통신, 통상의 나라"로서의 조선
1) 통신사의 왕래와 왜관무역
4. 마치며
본문내용
(1) 강화교섭과 조선의 대일정책
조선전기 200여 년간의 通交관계를 단절시킨 壬辰倭亂은 동양삼국에 커다란 정치적인 영향은 물론 피침략국이었던 조선에게는 아물 수 없는 전쟁의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고, 이후 조선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강화교섭은 의외로 빠르게 진척되어, 종전 후 불과 수년 만인 1607년 조선에서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여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국교가 재개되었다.
임란의 강화교섭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이었던 1598년 8월에 이미 명과의 종전 협상 중에 언급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1599년 3월에도 대마도(對馬島)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에 따라 강화 교섭을 위한 사자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 측의 기록에 의하면 1599년 6월, 대마도주 宗義智의 家臣 柳川調信의 명의로 부산 첨사 이종성(李宗誠)에게 보낸 書契(서계)가 처음이다.
조선통신사라 하면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일본 바쿠후 쇼군(幕府 將軍)에게 파견하였던 조선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뜻한다. 이러한 내용에 따르자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선의 사절은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서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 종사관 정호관(丁好寬)을 삼사로 하는 일행 467명의 파견을 효시로 하여, 1617, 1624년의 3회와, 사절의 명칭을 통신사로 바꾸고 1636, 1643, 1655, 1682, 1711, 1719, 1748, 1764, 1811년의 9회를 합쳐 12회가 된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이르게 된다.
익히 알고 있듯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는 그 기원이 근대는 물론 고대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한일간의 교류를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후 양국의 국교 회복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통신사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참고 자료
조선통신사 (中村榮孝)
한일 교류사 (이진희 외, 학고재, 1999)
한일 관계사 재조명 (역사학연구회, 이론과 실천, 1991)
강좌, 한일관계사(조항래 외, 현음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