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석 신계영-<전원사시가>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2.02.20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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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계영의 생애
2. <전원사시가>를 통해 보는 신계영
3. 맺음말
본문내용
1. 신계영의 생애
신계영(辛啓榮, 1577~1669)
본관 영산(靈山). 자 영길(英吉). 호 선석(仙石). 시호 정헌(靖憲). 1601년(선조 34) 생원이 되고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624년(인조 2)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으로 도일(渡日),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사립(嗣立)을 축하하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동포 146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1634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637년 속환사(贖還使)로 선양[瀋陽]에 다녀와서 강화(江華)부사가 되었다. 1639년 부빈객(副賓客)으로서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으러 다시 선양에 갔고,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665년(현종 6) 중추부지사(中樞府知使)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1667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올랐다. 문집 《선석유고》가 있다.
2. <전원사시가>를 통해 보는 신계영
그 성품이 진실 순수했고 그 풍모는 독실 돈후했다.
진퇴(進退)에 한결같이 효도하고 충성스러웠다.
혼조를 만나서도 스스로 깨끗하여 세속을 따르지 않고, 굳게 자신을 지키면서 시대가 맑아지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그 부위를 떨쳤다.
흰 눈썹에 누런 머리칼로 풍채가 학과 같았다.
신계영은 94세(현종 10년, 1669)로 천수를 다하였다. 위 구절은 현종이 내린 御製文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보면 그의 생전 풍모와 풍류심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벼슬길에서 물러나 향리에 ‘월선헌’의 정자를 이루고(1655), 만년을 유유자적하며, 「월선헌십륙경가」, 「전원사시가」, 「연군가」, 「탄로가」, 등의 가사와 시조를 손수 지어 읊조리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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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 풀어쓴 옛 시조와 시인, 새문사, 2007.
김상진, 신계영의 <전원사시가> 고찰, 한국시조학회, 시조학논총, 2006
최승범, 신계영의 전원사시가, 그 풍류성, 시와시학사, 시와시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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