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절대왕정 중상주의 정책
- 최초 등록일
- 2012.02.02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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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목차
Ⅰ. 아르망 리슐리외
1. 리슐리외의 일생
2. 리슐리외의 국가정책
1) 국가정책에 미친 요인 - 대외상황
2) 리슐리외의 국가정책의 기반
3) 리슐리외의 국가정책
4) 리슐리외의 경제정책
3. 리슐리외의 역사적 의의
Ⅱ. 장 바티스트 콜베르
1. 콜베르의 일생
2. 콜베르의 경제정책적 신조
3. 콜베르의 경제정책
1) 규율을 엄수하는 양질의 노동에 대한 교육
2) 납세의무자 수의 증대(인구 증대)
3) 산업의 확충과 발전
4) 무역흑자를 통한 화폐량의 증대
4. 콜베르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Ⅰ. 아르망 리슐리외
1. 아르망 리슐리외(1585.9.9.~1642.12.4)의 일생
프랑스의 정치가로서, 재상의 지위를 인정받아 책임 관료제를 수립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 출신으로 지금의 앙드르 에 루아르 데파르트망에 영지를 가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5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1606년 서부 해안의 뤼송 주교로 임명되었다. 1614년 전국 삼부회에서 열변을 토하여 루이 13세의 모후이며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를 섬겼다. 2년 후 왕실 고문관으로 있었으나 루이 13세의 친정과 함께 궁정을 쫓겨나(1617) 아비뇽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최초의 저서 《교리문답》을 썼다. 왕에게 저항 중인 모후 마리의 초청을 받아 측근으로서 각지에 전전하는 한편 화평을 위한 조정에 힘썼다. 1624년 궁정 복귀가 허용되어 왕의 고문관으로서 루이 13세의 신용과 신뢰를 얻었다. 1627년 왕과 협력하여 라로셸에 근거를 둔 신교도의 반란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왕과의 긴밀한 관계는 옛 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사이를 멀게 하였다. 마리는 왕의 동생인 가스통과 마리약 형제 등 화평파 고문관과 함께 부국강병·적극외교를 주장하는 리슐리외와 대립하였다. 야망파인 황족·구 귀족들은 모후인 마리편을 들었다. 1630년 11월 그들은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왕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것을 ‘뒤프(속은 사람들)의 날’이라고 한다. 그 후 리슐리외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왕으로부터 재상의 지위를 인정받아 책임 관료제를 수립하고, 왕권의 위력이 전국에 스며들게 하였다. 1635년 리슐리외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황제를 후원하는 에스파냐와 대치하였다. 이듬해 프랑스는 에스파냐 육군의 침입을 받아 한때 파리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적을 국경선에서 저지시켜 곧 반격전을 폈다. 1642년 프랑스 왕이 에스파냐의 지중해 연안 르루숑 지방을 제압하기 위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을 때 리슐리외도 동행하였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파리로 되돌아와서 12월에 죽었다.
참고 자료
・대국굴기제작진, 노경아 역, 『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 프랑스편』, 안그라픽스, 2007
・서지연, 「리슐리외 시대의 왕권과 대귀족」『서양사연구 vol.22』, 한국서양사연구회, 1998
・와타히키 히로시 외, 김현영 역, 『편지로 읽는 세계사』, 디오네, 2007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6
・카를 에리히 보른, 김용원 역, 「콜베르」『경제학의 거장들Ⅰ』, 한길사, 2007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57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