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땀 한땀 공들여 적은 레포트
목차
Ⅰ. 朋黨, 黨爭, 蕩平
1.朋黨觀 및 朋黨政治의 전개
2. 붕당 간 갈등의 심화
3. 蕩平策
4. 당쟁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 朋黨觀의 변화
붕당은 본래 유교 정치 사상에서 당초에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중국 漢나라와 唐나라때까지만 해도 붕당은 죄악시되고 처벌받았다. 그러나 宋代에, 집단으로서의 붕당은 정치에서 부정될 수 없음을 전제로 삼고, 붕당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등장한다. 특히 구양수는 붕당을 군자당, 다시 말해 眞朋과 소인의 당, 소위 僞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군주가 진붕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저절로 정치를 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자 역시 구양수와 견해를 기본적으로 같이 하면서, 만일 어떤 붕당이 ‘군자의 당’이라면 임금 역시 그 당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중국 송대의 붕당관은 양자강 남쪽 지역의 경제적 성과를 배경으로 정치 참여층이 확대된 데 따른 것이었다1).
고려 말 이래 경제적 · 사회적으로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우리 역사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붕당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정도전, 조광조 등이 조심스럽게 붕당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2). 선조 즉위 무렵부터는 훈척계에 대한 사림계의 우세 아래 구양수 · 주자의 붕당론이 正論의 자리를 확실히 정하게 되었고3), 선조
참고 자료
이태진,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汎潮社, 1985. pp. 14-15.
김종수,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솔, 2002. p. 51.
이태진, 전게논문. pp. 15.
『선조실록』권17, 선조 16년 9월 신사. 김종수, 전게서. p.57.에서 재인용.
“兩便 친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배척하여 東人 · 西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은 동쪽 건천동에 있고, 의겸의 집은 정릉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李肯翊, 『燃藜室記述』권13, 선조조고사본말 동서당론지분. 김종수, 전게서, p.58에서 재인용.
전랑 : 조선시대 경관직(京官職)인 6조 가운데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합하여 전랑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관제상 인사권을 장악한 관청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이며, 이 양조의 정랑(正郞)을 특히 양전(兩銓)이라 하였다. http://terms.naver.com.
김종수, 전게논문. p. 52.
강주진,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5. pp. 223-224.
강주진, 전게서. pp. 135-136.
강주진, 전게서. p. 241.
이때, 강경론을 내세웠던 李山海는 강북에 살았고 온건론을 주장했던 柳成龍은 강남에 살았기 때문에 南人 · 北人의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