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의 대외관계 연구,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 최초 등록일
- 2011.12.15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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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대해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1.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둘러싼 논의
종래 일본열도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묘제로 생각되어 온 전방후원분은 1980년대 전반 이래 한반도 남부의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되어 현재 모두 13기가 확인되었다. 전방후원분은 야요이시대 분구묘에서 자체 진화하여 3세기 중반 일본열도에서 출현한다. 한편,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6세기 전반에 한정되어 조영된 점에서 그 기원이 일본열도에 있음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쟁점으로 부상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피장에 대해서는 재지수장설과 왜인설로 양분되고 후자는 다시 일본열도로부터의 이주자설과 왜계백제관료설로 분류된다.
목차
1.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둘러싼 논의
2. 전방후원분의 구조와 유물
3. 전방후원분의 피장자
1) 피장자가 재지수장이라는 견해
2) 피장자가 왜인이라는 견해
4.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출현의 역사적 배경
본문내용
1.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둘러싼 논의
종래 일본열도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묘제로 생각되어 온 전방후원분은 1980년대 전반 이래 한반도 남부의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되어 현재 모두 13기가 확인되었다. 전방후원분은 야요이시대 분구묘에서 자체 진화하여 3세기 중반 일본열도에서 출현한다. 한편,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6세기 전반에 한정되어 조영된 점에서 그 기원이 일본열도에 있음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쟁점으로 부상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피장에 대해서는 재지수장설과 왜인설로 양분되고 후자는 다시 일본열도로부터의 이주자설과 왜계백제관료설로 분류된다.
재지수장설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종래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 재지 기반을 가지지 않고 돌연 출현하는 과정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인설은 영산강 유역을 『송서』 왜국전에만 보이는 모한지역으로 보고 있으나 그 실체에도 의문이 있고, 영산강 유역에 왜인 집단이 대거 이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6세기 전반의 1세대에 한정되어 조영된 점, 왜계 고분이 집중하는 ‘임나일본부’라는 중심지를 형성하지 못한 점 등을 볼 때 4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이른바 ‘임나일본부’와 어떠한 관련도 상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나일본부’가 성립하고 전개되었다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대에는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분이 조영되지 않고 오히려 소멸되는 시기에 해당 지역에서 돌연 출현하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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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철, 2000,「고대의 낙동강, 영산강, 그리고 왜」『한국의 전방후원분』, 충남대 출판부
주보돈, 2000,「백제의 영산강유역 지배방식과 전방후원부 피장자의 성격」『한국의 전방후원분』, 충남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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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학회, 2007, 「영산강유역 정치제의 성격」『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서경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