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민족의 저항
- 최초 등록일
- 2011.12.14
- 최종 저작일
-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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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 동아시아 수업 A+과제입니다. 근대 동아시아 중국에 대해 완벽히 정리되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부터 5.4운동을 거쳐 국공합작, 대장정, 항일 전쟁까지 중국 근대사 전반을 다루었습니다.
목차
Ⅰ. 서론
-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
Ⅱ. 본론
1.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
-5.4운동
-국민혁명
2. 일본의 중국침략의 대한 항일 민족 운동의 고양
Ⅲ. 결론
본문내용
Ⅰ.중국의 민족주의 운동
1)..5.4운동
배경-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원세개 중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교전국들이 중국의 영토와 영해에서 교전을 하거나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중국의 선언은 일본에 의해 묵살되었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 내에서 세력신장을 꾀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동맹관계인 영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바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가졌던 교주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일본군은 산동반도에 있는 청도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산동반도를 장악하였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한 이유는 독일이 극동에 설치한 기지를 공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동 전역을 차지하겠다는 야욕에서 출발하였다. 중국은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5년 일본은 원세개에게 "21개조"를 요구하였다..중국은 이러한 일뵨의 요구조건을 다른 열강을 통하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일본에게 강력한 요청에 의해 21개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1915년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 민중은 격노하였고, 중국을 제2의 조선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팽배하여 일본상품의 불매운동, 국산품 장려운동과 같은 반일운동이 전개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국의 민중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14개 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중국은 1917년 단기서 군벌 정부의 대 독일 선전포고로 1차 세계대전에 전승국이 되어 남북정부의 대표 5명이 미, 영, 일, 프, 이의 5개국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독일이 산동성에서 가지고 있던 권익을 반환하고 21개조 조약 의 무효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이 갖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에 4월 21일 이탈리아를 제외한 영국, 프랑스, 미국의 4개국 회의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에게 넘긴다고 명시하였다.
중국 외교의 실패의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 민중은 제국주의 특히 일본과 단기서(段祺瑞)군벌 정부에 대해 격분하기 시작했다. 5.4운동 이전에도 규모가 큰 학생들의 반일 운동이 두 차례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15년 일본이 21조를 요구할 때 일어난 반일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918년 중일군사 협정으로 일어난 것인데, 모두 일본 유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 따라서 5.4운동 이전의 중국에서의 격한 반일 감정이 파리회의에서 불공정한 열강들의 결정으로 인해 5.4운동으로 이어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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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사 1, 2, 3』 - 肖效欽·李良志 共著 / 최윤수 譯, 거름 1990.
『중국 혁명의 전개과정』- 중국사연구회 編著, 거름 1985.
『중화민국사』- 요코야마 히로아키 著, 서산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