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과 진보당사건
- 최초 등록일
- 2011.12.07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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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에 대한 조사 및 감상입니다
조봉암의 생애와 진보당사건 당시의 시대적 배경, 진보당사건재판과정, 법률적쟁점을 법학적 관점에서 추가보충하였습니다.
목차
조봉암의 생애와 진보당사건 당시의 시대적 배경, 진보당사건재판과정, 법률적쟁점
본문내용
Ⅰ. 조봉암의 생애
조봉암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으로 1899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조창규와 어머니 유씨의 5남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오래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빛날 환자대신에 바위 암자를 돌림자로 썼으며, 꿈에서 봉을 보아서 이름이 봉암으로 하였다.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 처지가 못 된 조봉암은 강화에서 4년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관립실업학교라는 보습학교를 마쳤다. 청소년 시절 공부에 별로 취미가 없었던 듯한데, 조봉암의 "내가 걸어온 길"1)에서는 아침에 책보를 들고 학교를 갔다가 돌아와서는 다시 책보를 펴지도 않고 이튿날 그 책보를 그대로 들고 학교를 갔다고 한다.
이러한 조봉암은 형편 상 일급 10전의 급사노릇과 월급 7원을 받는 강화군청 고원생활을 하였는데 특히 주산에 재능이 있어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허나, 1년도 채 못 되어 일본인 서무주임과 싸우다가 일을 그만두고 만다.
11세에 세례를 받았던 조봉암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교회일도 성실히 처리 하였는데,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김광국 목사의 추국충정 설교를 통하여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수백만의 농민은 영세소작인 화전민 또는 노동자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을 맞게 되고, 고종의 죽음이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일본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데 이어 3월 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참고 자료
김상중, <죽산조봉암평전>, 시대의 창, 2010년, 219쪽
김학준 인천대학교 前 총장,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 중.
HID Higher Intelligence Department, 한국군 특무정보기관으로서 대북한 첩보공작부대.
조국, 現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 중.
미국 국립 문서 보관서. 워싱턴D.C,
대법원 2011.1.20. 선고 2008재도11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993B9C85CB7DF068E043AC100C64F068&courtName=대법원&caseNum=2008재도11&page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