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정의 시작-아우구스투스
- 최초 등록일
- 2011.12.06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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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로 본 서양고대사의 아우구스투스 편을 요약하고 그에 대한 코멘트를 삽입한 글입니다. 아우구스투스란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와 업적, 평가를 조사하는 리포트 작성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목차
1.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
2.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3.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에 관한 논쟁과 전망
본문내용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일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 이야기-배은숙>
1.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후 옥타비아누스로 칭함-로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옥타비우스는 원래 기사출신이었으나 여러 관직을 역임함으로써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의 두 번째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였다. 옥타비아누스가 4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사망하자 아티아는 곧바로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4번 결혼을 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기원전 48년의 콘술이었던 세르빌리우스의 딸이었는데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위해 그녀와 이혼하고 안토니우스의 의붓딸 클라우디아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이어 율리아의 생모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티베리우스의 생모인 리비아와 결혼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잦은 와병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이 30세였던 그 시절 78세까지 살았다.
많은 사가들이 그를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파악하는데 그가 모호한 형식을 취하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연설습관에서 볼 때 그는 완벽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내란이 종결된 후에는 되도록 인자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하였다.
친아들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각별히 총애하여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파와 전쟁할 때 16세인 옥타비아누스를 참모진에 참가시키고자 할 정도였다. 폼페이우스파와 전쟁이 끝난 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위해 마케도니아로 6개 군단을 파견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군단과 동행했으며 그 뒤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아폴로니아에 갔다가 절친한 친구이자 나중에 후계자로 고려한 아그리파를 만났다.
카이사르가 살해되고 공개된 유
참고 자료
조현미,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황제숭배 양상에 관한 검토-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23』, 2004.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물들을 참조.
배은숙,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31년-기원후 14년) 원로원 구성원의 변화?, 『대구사학 53편』, 1997.
배은숙, ?원로원 회의 장소와 아우구스투스의 영향력?, 『계명사학』,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