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광종의 개혁정치
- 최초 등록일
- 2011.11.11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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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왕조의 유지를 위해 펼친 광종의 개혁정치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광종 이전의 정치 상황
2. 광종의 개혁정치
1) 지방에 대한 통제 강화
2) 칭제 건원과 황도(皇都)
3) 노비안검법
4) 과거제와 백관의 의복 정비
5) 불교 정비
3. 광종의 지지세력
4. 대숙청
5. 결론
본문내용
1. 광종 이전의 정치 상황
광종 즉위 전, 그의 형들인 왕무(혜종)와 왕요(정종)가 차례로 왕에 즉위했었지만, 모두 제위기간에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짧은 제위기간은 태조인 왕건이 죽은 후, 호족 세력들 간의 권력 다툼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의 2대 왕인 혜종은 왕건과 함께 후삼국통일 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왕건도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는 강한 호족 세력이 아니었고, 게다가 중심지인 개경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지역이라 혜종을 뒷받침해 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반면, 왕요와 왕소(광종)는 외가가 충주 유씨이자 후삼국 통일에 많은 공을 세운 유긍달이 외조부였다. 태조는 이를 염려하여 당시 군권을 가지고 있던 박술희와 한강 유역의 강력한 호족인 왕규에게 혜종을 맡긴다. 하지만 오히려 왕규가 난을 일으키고 왕요의 후견 세력인 왕식렴에게 진압 당하면서, 권력은 왕요, 왕소 형제에게 넘어가고 마침 혜종이 병으로 죽으면서 왕요가 정종으로 즉위한다.
정종은 매우 근면성실한 왕이었다. 최승로는 그가 아침부터 밤까지 업무를 처리하느라 끼니도 거를 정도였고, <무일편>을 실천한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정종의 후견 세력은 서경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왕식렴과 그의 외가인 충주 지역 호족들이었다. 특히 왕식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정종은 서경 천도를 계획했다. 서경에 성을 축조하고 개경 백성들을 서경으로 이동시켰는데, 고된 노역과 강제 이주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또 개경 세력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한다. 정종 4년(949)에 궁궐에 큰 벼락이 떨어져 이에 놀란 정종은 병이 심해져 죽었다 하고, 왕식렴은 정종이 죽기 전인 949년 1월에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김창현 교수는 정종 때에도 개경 세력을 기반으로 한 왕소와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종 간의 세력다툼이 있었을 것을 보고 있다.
참고 자료
『오백년의 리더십, 광종의 제국』, 김창현, 푸른역사, 2008
『광종, 삼한 융화를 이루어낸 고려의 황제』, 김창현, 내일을 여는 역사, 2002
『광종의 정치기반』, 윤성재, 한국사학보,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