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사회와 사상(박제가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1.10.16
- 최종 저작일
- 2011.06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조선후기의 사회와 사상을정리한 글이다. 조선후기의 다양한사상이 많이있지만 특히
실학자인 박제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사회와 사상을 정리하였다.
목차
1.들어가며
2.조선후기의 사회
3.조선후기 실학의 등장과 박제가
4.정리하며
5.참고문헌
본문내용
2.조선후기의 사회
1). 농업생산력의 발달
17-18세기에 이르러 조선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근원적으로 유발하면서 추동하여 간 것은 경제구조의 변화였다. 농업생산력이 발달하면서 토지를 둘러싼 소유관계와 농민의 부담형태가 변하여 갔고, 아울러 농촌사회도 재편되어 갔다.
생산력 발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모내기의 보급이었다. 이전까지는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이 일반적이었으나 이제는 모판에서 모를 가꾸어 본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이로써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훨씬 증가하고 김매는 노동력도 절감되었으며 또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분과 퇴비, 재 따위를 섞어 거름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여 거름의 종류와 양이 풍부해졌고 수리시설도 저수지와 보를 중심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모내기의 보급을 더욱 촉진하였다.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이 발달하였다는 사실은 토지를 이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시비법, 농구, 수리시설, 경종법 등의 발달을 바탕으로 경작지를 이용하는 방식이 발전하였다. 그러한 발전은 좁게는 전부제도(田畝制度)의 변화로 나타났고, 넓게는 전 경지 자체의 이용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는 조선 후기에 한전의 경작지를 광무(廣畝)로 정지하여 작물을 재배하다가 조선 후기에 경작지를 세밀히 다스리고 고무(高畝)로 경작하면서 근경법 또는 견종법이 확대되면서 작물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확량이 증가하였다. 후자는 고무 전 시기의 추이로서 휴경농법에서 연작농법으로, 다시 연작농법에서 윤작농법으로의 발전을 들 수 있다. 그 중 조선 후기는 연작농법에서 윤작농법으로 이행되어가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수전에서 이앙법의 보급과 아울러 도맥(稻麥)이모작이 확대되었고, 한전에서 근경법의 발달로 추맥(秋麥)을 근간으로 2년3작 또는 2년4작이 보급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파종법, 시비법, 농구 및 수리시설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토지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이 발전하였으며 더 넓게는 토지를 이용하는 방식이 발달하면서 농업생산력이 발달하였다.
참고 자료
<박제가 자료>
송재소 外 10명 ,『박지원·박제가 새로운 길을 찾다』, 경기문화재단, 2006
강필선 外 20명, 『한국실학사상사』, 심산, 2008
계명대학교 사학과 한국의사회와 사상 강의자료 2011
<조선후기사회 자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역사비평사, 1998.
이태진, 「농업기술의 발달과 문화변천」, 『한국사특강』, 서울대 출판부, 1990.
오미일, 「상품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한국사』9, 한길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