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 최초 등록일
- 2011.10.11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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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효
목차
서문
본문
1. 원효의 일생
2. 원효의 사상
원효의 일화
1. 원효대사와 해골 물
2.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소요산
3. 자재암의 전설
4. 원효 불기(元曉不羈) 설화
본문내용
서문
중세는 고대적 유제로 내려온 고대적 상징의 세계와 중세에서 새로 시작된 상징이 뒤얽힌 그야말로 풍성한 상징의 시대였다. 상징을 통해 언어의 진의를 풀이해주고 알려주는 일, 상징을 통해서 집단적 떨림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상징을 풀이하는 이의 상징 풀이의 능력, 그 해독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갖게 한다. 상징을 풀이하는 이는 상징 풀이의 능력으로 권위를 갖고 자신의 언설을 강요할 수 있다. 그것은 계몽이다. 상징과 권위, 계몽은 중세의 언설이 의사소통의 장에서 지배적인 위세를 발휘하기 위해서 활용했던 성능이 썩 좋은 무기이다.
7세기에 신라는 정시 사회적으로는 중세적 정치 질서와 고대적 유제, 중앙 중심적 통치 질서와 지방의 반발이 서로 대립했다.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외전(外典), 대승과 소승, 중관과 융식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상의 통합과 지역의 통합, 계층의 통합과 문화의 통합이 7세기 신라가 직면했던 중요한 문제였다. 그 시기에 원효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원효가 문학에 대한 직접적인 언설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온몸으로 상징을 구현했다.
이제 이러한 원효의 생애를 알아보고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남긴 작품을 살펴보자.
본문
1. 원효의 일생
(1) 진평왕 39년(617년)
원효의 성은 설 씨이다. 아버지 담날(談捺)은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의 불등을 촌에 살았던 11위인 내마(奈麻)였다.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으며, 출산 때에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한다. 원효는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는데, 진평왕 39년(617년)이었다. 담날은 아이의 이름을 서당(誓幢)이라고 지었다. 불등을 촌은 원효를 배출한 인연으로 해서 불지촌(佛地村)으로 불렸다.
당시 신라 사회는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골품제에서 최고의 특권계급은 서울에 사는 진골이었다. 원효는 지방출신인데다 비특권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애초부터 세속적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당시는 삼국간의 전쟁이 빈번하였고 전투의 양상도 날로 치열해져, 대다수 민들이 물질 정신적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었다. 말하자면 7세기 신라인들의 삶을 지배한 것은 바로 ‘골품제’(혈연)와 ‘전쟁’(폭력)이었던바, 그것은 비이성적인 가치이되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원효의 출가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인가, 아니면 소극적인 도피인가는 알 길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동시대의 유교지식인이 출세간적인 삶이라고 비판했던 불교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참고 자료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03). 「원효-영원한 새벽」.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인물열전1』. 돌베개
김성룡 (2004). 「원효의 글쓰기와 중세적 주체」. 『한국문학사상사1』. 이회
원효학연구원 http://www.wonhy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