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후삼국통일
- 최초 등록일
- 2011.09.21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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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후삼국
목차
- 목 차 -
1.머리말
2.고려 태조 왕건과 후삼국 통일
3.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 정책
4.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대한
평가와 의의
5.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남북통일
6.맺음말
본문내용
1.머리말
고려는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47년 간의 혼란 상황을 극복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분열에서 통일의 역사를 창조한 것은 민족사에 있어 큰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시기에 한반도의 북쪽에 있었던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발해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고구려나 발해의 영토를 다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이는 신라 통일의 한계를 극복하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대해서는 그 과정에 대한 연구 김갑동,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서경문화사, 2010, p301.
가 집중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고려 건국 전(前)의 시대상황과 태조 왕건이 펼쳤던 통일 정책에 대해, 그리고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민족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나아가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본 남북 통일 정책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고려 태조 왕건과 후삼국 통일
1)신라 말기의 사회상황과 후삼국의 성립
중대(中代)에 어느 정도 안정된 체제를 유지했던 신라는 하대(下代)에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쇠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공(大恭)의 난을 계기로 하여 전국에서 96명의 각간(角干)들이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김양상(金良相) 김경신(金敬信)등이 혜공왕과 김지정(金志貞)을 살해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선덕왕(宣德王)으로서 하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죽은 후에도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김경신이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이후에도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은 계속되었고, 이와 같은 진골귀족들끼리의 왕위쟁탈전은 신라사회의 근간이었던 골품제의 모순 내지 붕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김갑동, 『고려전기 정치사』, 일지사, 2005.
-김갑동,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서경문화사, 2010.
-이교덕,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기반 조성 방안」,통일연구원, 2000.
-최수현, 「남북한 통일정책 비교 연구」, 대진대 통일대학원, 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