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대립의 역사적 고증을 통한 진단과 치유
- 최초 등록일
- 2011.07.09
- 최종 저작일
- 2011.06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8,500원
소개글
한국사의 고질적 암적 존재인 이념 간 대립을 파헤치며 그 해소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목차
목차
Ⅰ.들어가며
Ⅱ.이념 간 대립의 근원
Ⅲ.이념 간 대립의 양상
Ⅳ.이념 간 대립의 세태
Ⅴ.이념 간 대립의 폐단
Ⅵ.지역 간 대립의 치유
Ⅶ.이념 간 대립의 치유
Ⅷ.나가며
Ⅸ.참고 자료
본문내용
Ⅱ.이념 간 대립의 근원
한국사회에서 좌우익의 대립의 기원은 대체로 해방정국 시기에 진주한 미·소 군정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미군정의 통치아래 좌익계열의 인사들은 대부분 숙청되었고 그러한 시대사적 풍조는 훗날 미군정이 끝난 후 독자적인 정부수립 이후에도 ‘좌익사범’의 미명으로 정적제거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념 간 대립의 근원에 있어 그것이 민족 내부에서 발단이 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한 강압적인 지배에 기인했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의 이념대립은 그 성격이 한층 타율적이다. 우리사회의 이념 간 대립을 초래한 미·소 양군정은 이념에 있어서도 제국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던 당시 강대국의 부조리한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이루어졌고, 어떨결에 이루어진 광복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광복직후 정치의 중심은 몽양 여운형이었고, 그는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웠다. 9월 6일 박헌영과 협력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설립했으나, 미군정만이 3.8선 이하에 유일한 정부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35년의 일제강점기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은 외세에 의해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9월 총독부 앞 게양대에는 일장기가 내려졌지만 그 자리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가면서 미군정이 시작됨을 알렸다.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는 해방 이전 뜻있는 선구자들로 구성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건국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구상이 이미 끝난 상태로 해방 후 수습정국을 이끌어 나갈 민주적 정부설립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앞서보듯이 미군정 외 3.8선 이남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은 곧 자의적 정부수립 기회의 박탈과 동시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서로 다른 이념의 충돌이라는 민족분단의 복선이 되었다.
생략
참고 자료
강만길, 『해방전후사의 인식2』, 한길사, 1995.
이병천,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창작과비평사, 2003.
이헌태, 『전라도 대통령과 경상도기자』, 새로운사람들, 1999.
전광용, 『꺼삐딴 리』, 을유문화사, 2009.
학술단체협의회 저, 『5.18은 끝났는가』, 푸른숲, 1999.
<매일신문>
<조선일보>
<쿠키뉴스>
네이버 (www.naver.com)
KBS (www.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