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가야 연맹소국의 문화흐름
- 최초 등록일
- 2011.06.13
- 최종 저작일
- 2008.03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점수 잘 받은 발제문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伽倻史 槪括
Ⅲ. 後期 伽倻 文化
1. 古墳
2. 고령권
3. 함안권
4. 고성-진주권
5. 김해권
Ⅳ. 晉州와 固城에 위치했던 가야소국
1. 진주
2. 고성
Ⅴ.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가야(伽倻)의 역사(歷史)는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에서 가장 밝혀지지 않은 것 중의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문헌자료가 크게 부족한 데다가 종래에 고대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에서 커다란 쟁점(爭點)이 되어 온 이른바 임나(任那)문제가 이와 얽혀 있는 점이 가야사(伽倻史) 연구를 부진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야시대(伽倻時代)의 유적(遺蹟)에 대한 발굴조사에 힘입어 그 물질자료는 계속 축적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임나(任那) 문제에 있어서도 지금은 그곳의 성격에 관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이미 그것은 야마토(大和)정권의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에 소속된 현읍(縣邑) 혹은 정치적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釜山史學會, 「日本書紀 繼體欽明紀의 加羅關係記事硏究」『加羅史硏究』, 혜안, 1978
하지만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일본서기』 만큼 가야지방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료는 없어서 결국 엄격한 사료 비판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그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釜山大學校 韓日文化硏究所, 「加羅史草」『加羅史硏究』, 혜안, 1962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가야사 인식의 문제에 관한 여러가지 연구(흐름)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여 여기서 언급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우선 가야의 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겠으며 이후 후기 가야문화를 살펴본 후 진주와 고성에서 어떠한 식으로 가야문화가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겠다.
Ⅱ. 伽倻史 槪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가야사의 시작은 서기42년이며, 그 종말은 562년으로 산정 할 수 있으나 사료의 미비 상태로 이를 다시 세분하여 시기 구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왕력에 의하면 김해 駕洛國은 後漢 光武帝 建武 18년 壬寅(42)에 시조 首露王이 개국하고, 梁 武帝 中大通 4년 壬子(532) 즉 제10대 仇衡王 12년에 멸망하였으니, 그 전체 歷年은 490이지만 《삼국사기》지리지 및 신라본기에 의하면 고령 大伽倻國은 시조 伊珍阿王이 서기 42년에 개국하고, 제16대 道設智王에 이르러 신라 진흥왕 23년(562)년에 멸망하였으니, 그 역년은 520년이다. 그러므로 그 둘을 포괄한 가야사의 전체 시기는 42년부터 562년까지의 520년간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97
그러나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 자료와 삼국지, 일본서기, 광개토왕릉비등의 가야 관계 기사들을 추가하면 시기를 세분할 수 있겠다.
문헌상으로 보아 가야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둘이 있다.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의 문화중심은 김해지역이고, 5세기 이후의 문화 중심은 고령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4세기 이전을 전기 가야시대, 5세기 이후를 후기 가야시대로
참고 자료
翰林大學校 人文大學 史學科 『學術踏査資料集』, 199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97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 1 (古代編)』, 一潮閣, 2000
丁仲煥 『加羅史硏究』, 혜안, 2000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23』, 푸른역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