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도 구인회에 대한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1.03.28
- 최종 저작일
- 2010.10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1930년대는 문학의 황금기였다. 일제강점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장르의 문학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레포트는 1933년에 이태준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구인회라는 조직에 대한 내용이다.
구인회 조직이 무엇이고, 어떤 작가가 참여했으며,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문학을 사회운동의 도구로 보았던 조직 카프동맹과 구인회간에 경쟁과 가치관 상충에 대한 내용도 있다. 식민지 국가에 사는 지식인들이 독립과 개혁이라는 슬로건이 아니라 문학의 순수성, 미학성에 집중했을 때 그 한계와 어려움, 혹은 의의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
목차
구인회 조직
구인회의 활동
구인회와 카프
구인회의 존립방식
일제 치하 속 현실 인식과 미적 자율성
본문내용
구인회 조직
구인회는 1933년 8월 15일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결성된 문학 친목 단체로 알려져 있다. 구인회의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은 이전부터 카프 회원으로서 프로영화를 제작해 온 김유영과 등단 시기부터 동반자 작가의 색채를 띠고 활동해 온 이종명이었다. 이들의 문학적 경향은 구인회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계급문학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구인회 결성을 제안할 당시 이들은 오히려 일본의 신흥예술파를 선례로 삼아, 프로문학에 대항하려는 취지를 분명히 내세웠다. 이후로 구인회는 매일신보 학예부장 이었던 조용만, 동아일보의 이무영, 조선일보의 김기림, 조선중앙일보의 이태준을 영입하였고 당시 이태준 김기림과 더불어 “순수문학가 측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가, 시인”으로 꼽혔던 정지용과 이효석이 추가로 가입하게 되면서 회원을 일단 확정되었다.
그 후, 구인회 내부에서 일어난 의견 충돌로 이종명과 김유영이 3개월만에 탈퇴하고, 조용만이 나갔으며 이효석, 유치진, 이무영도 떠났다. 후로 구인회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의 주도로 모임을 정비하고 후에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회원으로 보강되었으며 김유정, 김환태도 새로 가입하여 동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구인회 활동
일반적으로 구인회는 하나의 문학 집단으로서 응당 갖출 법한 강령이나 회칙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조직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개별적인 작품창작을 위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직적 체계와 이념적 규율을 중시한 카프파에 비해 훨씬 활발하지 못한 활동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집단적인 문학활동으로서, 동인들이 모여 작품 월평회를 자주 열었고, ‘시와 소설의 밤’이란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시오 소설의 밤’에서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의 문학 강연과 정지용의 시 낭독이 좋은 반응을 얻자, 후에는 조선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조선신문예강좌’를 개최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