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 최초 등록일
- 2010.12.22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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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5경에대한레포트입니다
목차
1. 발해의 5경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5경
(2) 5경의 설치시기와 연원
(3) 5경의 기능과 수도 변천
(4) 유적, 유물로 살펴본 발해의 5경
2. 발해의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강역
(2) 발해의 강역에 대한 제논의
(3) 발해의 최대 강역
(4) 유적, 유물로 살펴본 발해의 강역
본문내용
1. 발해의 5경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5경
‘天寶 年間에 欽武가 도읍을 상경으로 옮기니 구국에서 3백리 떨어진 忽汗河의 동쪽이다…貞元(785~805) 때에 동남쪽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흠무가 죽으니 사사로이 諡號를 무왕이라 하였다. 아들 宏臨은 일찍 죽고 族弟 元義가 1년간 왕위에 올랐으나, 의심이 많고 포악하여 國人들이 그를 죽이고 굉임의 아들 華璵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다시 상경으로 還都하고 연호를 中興(중흥, 794)로 고쳤다’ (『신당서』권219, 북적 발해)
‘(光仁天皇, 寶龜 8年 春正月, 777)癸西 (발해의 史都蒙 등이) 남해부 土號浦에서 출발하였다’(『속일본기』권34)
(2) 5경의 설치시기와 연원
5경의 설치시기에 대하여 『속일본기』의 기록처럼 사도몽 등 발해 사신이 출발한 시기는 777년이기에 남해부 즉 남경의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시기는 776년으로서 최소한 5경 설치의 하한을 776년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발해의 5경 설치시기에 대해서 견해가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다. 즉 발해의 5경은 대체로 당나라의 4경제도가 완비되는 762년경부터 남해부의 이름이 등장하는 776년 사이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는 10대 선왕대나 11대 대이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고 늦추어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견해는 5경을 포함한 15부 62주가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것으로 중국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발해 5경제의 연원은 오행사상에 입각한 사상사적 의미가 더 강하다. 고구려의 5부제와 신라의 5소경, 백제의 5방제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함은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의 5경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발해의 상경성이 160여 년간 존속하였던 도성이고 당나라의 4경제도는 불과 4년 정도였던 점으로 보아 발해 5경제의 뿌리를 꼭 당나라 다음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도성의 구조라든지 하는 부분에서 도성제가 실시되면서 수용, 변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