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의 창립부터 해산, 그리고 의의와 한계
- 최초 등록일
- 2010.12.0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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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 강의 시간에 발표문으로 준비한 레포트이구요, A+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독립협회 창립
Ⅱ. 독립협회의 활동
(1) 독립문 건설
(2) 토론회 개최
(3) 만민공동회
Ⅲ. 독립협회 해산
Ⅳ. 독립협회의 의의
Ⅴ. 독립협회의 한계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독립협회의 창립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침략행위와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국의 체면을 손상당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내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서 국민적 통합을 이룩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을 해산시키고 친미, 친러적 성향의 박정양, 이완용, 이범진 등 정동파 중심의 내각을 출범시켰다.
정동파내각은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고 각종 잡세를 탕감해 주는 대만 수습책을 제시하였지만,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와 일본군의 주둔으로 말미암은 국내의 정치적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아관파천의 불가피성을 알리는 동시에 시정부의 정당성과 정책을 홍보하고 친정부적인 여론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본의 민간지 한성신보가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한 것을 계기로 정동파내각은 신문간행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신문의 역할을 가장 잘 알고있었을 서재필을 신문발간의 최적격자로 선정하였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시책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역설하고 근대적 민권사상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이어 정동파내각과 서재필은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함과 동시에 내정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개혁지향적인 인사들을 결집시키는데 착수하였다. 그 이유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한 정부차원에서 독립국가의 자주성을 주장할 명분이 미약하였을 뿐 아니라, 수구파들이 고종의 환궁과 아울러 갑오경장 중에 개혁된 모든 제도를 그 이전으로 복구시킬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정동파내각과 서재필은 수구파들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를 견제하는 동시에 개화파정권을 유지해야 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신용하,『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76
한국근현대사학회,『한국근대사강의』 : 한울, 1997
강만길,『고쳐쓴 한국근현대사』, 창작과 비평, 1999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41(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