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소파의 사상 비교
- 최초 등록일
- 2010.12.02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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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과 소파 방정환의 그 생애를 살펴보고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사상을 비교해보는 글입니다.
- 차례 -
1. 생애와 사상형성 배경
2. 사상
3. 교육사상(교육목적,내용,방법)
4. 현대적 의의
5. 정리(레포트 쓰면서 느낀 점)
목차
1. 생애와 사상형성 배경
2. 사상
3. 교육사상 ( 교육목적, 내용, 방법)
4. 현대적 의의
5. 정리 (레포트 쓰면서 느낀 점)
본문내용
정약용과 방정환의 교육사상 비교
1. 생애와 사상형성 배경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정약용은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고 학문의 현실적인 면을 알게 되어 실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익의 저술에서 특히 영향을 받은 부분은 경세치용의 실학과 서양과학의 우월함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자는 서학이었다. 다산은 이익의 저술을 읽으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학문을 정립해 나아가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다산은 22세 때인 1783년(정조7년) 세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증광시라는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정조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다. 다산은 이승훈과 천주학을 공부했는데 천주교와 만남은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주었다.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손을 떼었는데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그 후 다산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배다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타계로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고 무덤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3년상을 치른다. 33세 때 정조의 배려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홍문관 수찬에 재임하면서 화성 축조를 지휘하여 완성하기 시작했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이후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는데 이때에 농민의 궁핍상과 타락한 지방행정의 난맥상을 발견했다. 1795년 천주교를 포교하던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체포되자 이 사건에 연유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고, 그 후 다시 규장각에 들어갔으나 반대파의 계속된 모함으로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라는 외직으로 밀려났다. 1798년 내직으로 들어오지만 1800년 정조 사망 후 순조가 즉위하자 신서파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다가 1801년 투옥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고 이어서 강진으로 옮겨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1818년 9월 14일 유배가 풀리기 전까지 18년 동안 경사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하였고,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유교적 정신뿐만 아니라 제도, 법, 정치 등 여러 방면을 포함하고 있다. 1819년(순조19년) 귀양이 풀려 양주 본가에 돌아온 후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 1836년 2월 22일 마현에서 75세로 타계하였다. 다산은 방대한 저술을 하였는데 저작으로는 경집류 232건과 문집류 492권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