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리] 공산성
- 최초 등록일
- 2002.06.04
- 최종 저작일
- 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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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공산성
2. 공산성의 유적들
본문내용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성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문주왕 원년(475) 한산성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왕도를 지킨 이 산성은 남쪽으로 공주시가와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 금강의 남안에 연하여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며 장축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히 두고 있으며 북쪽의 금강과 함께 해발 110m의 산세를 십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천연적인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백제의 대표적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 선조, 인조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이중 외성(外城)이라 불리는 동문지 밖의 토성 467m와 영은사 앞 지(池)의 축조를 위해 쌓은 듯한 43m를 제외하면 2,150m가 된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이 보수되었고 성내 유적은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정사적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광복루 등이 남아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공산성은 백제의 왕도 웅진시기부터 오래 사연을 간직한 유적지이다. 고구려에게 밀려 공주로 천도한 백제는 공산성에 궁성을 마련하고 모든 어려운 일을 극복하고 왕권의 안정과 국력을 백양하는 한편 국제교류에도 적극성을 보여 대내외적인 지위를 재 확보하였다. 이 시기에 공산성에는 성곽과 함께 왕궁이 건설되고 임류각이나 연지같은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들도 마련하였다.
또 공산성은 전략적 중요성으로 수많은 환란을 겪어야 했다. 공산성에 있는 명국삼장비와 쌍수정사적비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자취이다. 공산성은 조선시기 충청도의 전략거점으로서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각종의 군사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성곽도 선조, 인조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의자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仁祖)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산성은 '택리지'에서 기록한대로 "성안에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강화, 광주와 함께 전략적인 중요한 지역" 이었다. 또한 공산성에는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 사이의 산책로도 있다. 그리고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과 같은 금강이 발아래 에서 찰랑인다.
참고 자료
http://www.happycampus.com/report/view.hcam?no=1147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