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에서 일어난 학살의 기억 (6.25)
- 최초 등록일
- 2010.07.31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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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남에서 일어난 학살의 기억
목차
● 여수 ▪ 순천 양민 학살 (1948. 10. 20)
● 해남 ▪ 완도 양민 학살 (1950. 7)
● 함평 양민학살(1950 - 1951)
- 민간인 학살의 표면적인 이유
- 민간인 학살의 내재되어 있던 배경적 요소
- 미간인 학살의 피해자
본문내용
한국은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 대결과정에서 빚어진 양민학살, 6 ▪ 25 전쟁을 전후에서 나타난 이념대립의 양민학살, 이 과정에서 좌우 양측으로부터 빚어진 보복적인 양민학살, 독재 권력의 학생 ▪ 시민 학살 등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참으로 견디기 힘든 참극을 겪었다.
그렇게 학살당한 사람은 자그마치 1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고 ▪ 무관한 양민들이다.
좌익척결의 이름으로, 공비토벌의 명분으로, 통비분자라는 구실로, 용공이적,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1 백만 명의 억울한 사람이 희생된 것이다. 젖먹이 어린이도 죽었고 꽃다운 처녀들도 죽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총살 되었고,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에 불을 질러서 뛰쳐나오면 무차별 총질로 학살하였다.
양민학살은 우리 시대의 아물기 어려운 비극이로 상처이다. 학살은 외국군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이는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러한 학살이 같은 민족 간에 이루어 질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이제부터 6 ▪ 25전쟁을 전후하여 남한 땅에서 군과 경찰 ▪ 우익단체들에 의해 학살당한 학살, 즉 국가에 의한 학살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특히 내가 사는 이 고장 전라남도의 학살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전라남도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족들의 원과 한이 맺힌 오욕의 역사를 알아보고, 그러한 학살이 일어났던 배경, 그리고 그 학살의 대상이 된 양민들의 입장에 대해 알아보자.
● 여수 ▪ 순천 양민 학살 (1948. 10. 20)
여수 ▪ 순천 사건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정치적 ▪ 이념적 갈등이 빚어낸 최초의 민족적 비극이었다. 여수 주둔 제 14연대에 4 ▪ 3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제14연대 사병들은 동족상잔을 거부, 반란군으로 돌변하기에 이른다.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이렇게 시작된 반란군은 20일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를 설치, 순천까지 진출하였으며, 여기에 공산당원과 일부 시민들이 합세, 여수 ▪ 순천 일대는 반란군과 인민위원회의 세력하게 들어갔다.
참고 자료
없음